어느덧 새해가 되었다. 그러나 ‘새해’라는 의미가 시간상의 구분이지 요즘같이 광속의 체감 시간대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듯이 느껴진다. 예전 같으면 연말연시가 다가오면 우선 거리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의 캐럴에서 한 해가 마무리되는 것을 아쉬워했고, 연하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는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세태는 이제 없어져 버린 것 같다. 연말의 캐럴도, 새해 연하장도 말이다. 그게 디지털 문명이 가져온 생활의 편의성이나 첨단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통해 그나마 송구영신의 인사를 나누게 되니 세상은 편리함이라는 미명아래 더욱 삭막해지는 것 같다. 우리처럼 아날로그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로서는 옛 적의 훈훈한 정감과 운치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필자는 강원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감성이 어른이 된 지금에도 밑바탕의 정서가 되어 있다는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그게 지금 필자의 ‘문화적 감성’과 ‘인간적 모습’을 만들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음울하고 삭막한 정경의 겨울이었지만 거기에는 동심의 멋이 있었다. 깊은 골짜기의 냇가를 뒤져 괭이로 두꺼운 얼음장을 깨고 알배기 개구리를 잡던 흥취도, 댓(竹)쪽을 뻐개 비탈길에서 미끄럼 타며 즐기던 멋도, 한 길이나 눈이 쌓인 지붕을 머리에 이고 알밤 굽던 동짓달 긴긴밤의 정취도 이즈음이면 새삼 그리워진다.
이 모든 것은 아마 요즘의 용어로 얘기하자면 ‘감성(EQ)’일 것이다. 그래서 감성은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문화요, 예술인 것이다. 그래서 문화예술을 추구하면서 인간적인 모습이 감성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문화적’이지 않은 것이다. 감성이 풍부하다는 것은 삶의 여유가 있고, 인간의 정이 넘치고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문화를 심는다는 것은 개인이나 지역사회를 감성화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사회가 기계문명의 첨단을 달리며 오히려 감성이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다. 어우르기보다 개인과 개인의 경계가 명확해지며 온 사회는 갈등과 대립의 각만 예리해지고 있다.
온 국가가, 모든 지역사회가 한결같이 ‘문화예술’을 외치지만 그게 하나의 기능과 도구로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진정한 문화는 우리의 삶 속에 온건히 녹여져 있는 감성의 활력소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로젠블래트의 말대로, ‘문화란 바로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느끼고, 교감하는 것의 집합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문화와 예술은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와 더 궁합이 맞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문화관광부는 2006년 문화 향수 실태 조사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일반인들의 순수예술 분야 문화향유율이 97년에 비해 3분의1 수준 이하로 떨어졌다고 한다. 국민들의 소득은 늘었지만 마음의 여유는 더 없어졌다는 분석이다. 말하자면, 국민의 감성이 이 전보다 더 메말라졌다는 얘기다.
이제 우리에게는 참다운 문화운동이 절실하다. 그래서 감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제동 풀린 무한질주에서 벗어나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외형은 디지털이지만 내면은 아날로그의 멋을 향유하는 ‘이중 성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 감성을 찾는 일에 문화예술공간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 아트센터가 공공성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명 때문이다. 이제 2007년은 모든 지역마다 문화감성 부흥의 원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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