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이 주는 감동은 우리의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삶의 원천적 힘으로 작용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평화주의적 봉사의 삶을 산다든지,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고 천재와 인간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 보며 좌절하다가도 다시 힘을 내어 노력한다든지,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명곡의 음악성에 심취해 우주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명상한다든지, 원시 벽화를 보고 시공을 넘나드는 인류의 삶의 흔적에 관심을 갖는다든지…. 이러한 것들은 어떤 사람에겐 일상적 생활의 작은 부분, 또 어떤 사람에겐 삶의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제공하기도 한다.
필자는 그림을 하는 사람이지만 가장 감동을 받았던 예술작품을 들라고 한다면 문학작품중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들고 싶다. 초등학교 때 읽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장발장이 탈옥, 숨어 지내면서 자베르 경감에게 잡힐듯 말듯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는 숨막히는 스토리에 정신을 빼앗기며 읽었던 것 같다. 중·고교때는 탈옥수로 양심을 갖고 괴로워하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선을 베푸는 장발장의 순수한 인간성에 감동을 느꼈다. 대학시절에는 개혁과 보수의 갈등, 정치 사회적 불안 속에서 사회를 균형있게 보는 시각을 마련해줬다.
이야기 전편을 통해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장발장을 잡기 위해 쫓아 다니는 자베르 경감이 자신의 손에 수갑을 채운 채 세느강에 투신, 시체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수갑은 평소 자베르 경감의 법에 대한 신념과 가치관을 상징하고 있는데 그 수갑으로 자신의 손을 채운 채 강물에 투신 자살하는 장면을 설정하는 빅토르 위고의 의미 깊은 상징법에 또 한번 감탄하게 된다.
즉 사회의 제도와 법을 상징하는 자베르 경감의 수갑이 장발장의 감동적 양심과 선행, 즉 휴머니즘에 무릎을 꿇는 장면이다. 빅토르 위고는 사회적 제도와 법 이전에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란 사실과 숭고한 휴머니즘을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레미제라블은 어린이에게, 어른에게, 노인에게, 또는 직업 등에 따라 각각 다가오는 의미의 각도가 다르다.
문학가에겐 이 작품의 아름다운 문체, 정치가에겐 사회의 갈등상황, 법률가에겐 법의 집행 문제, 철학가에겐 인간의 선과 양심, 종교가에겐 절대자의 존재와 신앙의 힘 등에 대한 의미가 가슴에 다가서게 하는 명작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박동수 의왕미술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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