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비례의 정신적 아름다움

박동수 의왕미술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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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황금비례를 눈으로 보아 가장 편안하고 좋은 느낌을 주는 비례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볼수록 이러한 시각·감각적 아름다움 이외에 이 황금비례에는 오묘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황금비례에는 정말 깊은 철학적 정신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선 황금비례를 정확한 수치로 나타내면 무리수로 나타난다. 이 무리수는 소수점 이하 자리로 끝없이 내려가는데 순환소수와는 달리 다음 아랫자리의 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수학이 발달한 고대 이집트에서 이 무리수를 처음 발견했을 당시에는 이같은 수를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 함부로 발설하는 자는 대해 사형에 처했다.

다음 자리의 수를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끝없이 아랫자리로 내려가는 소수이니 그럴만도 하다. 마치 깊은 물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더 무섭고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알 수 없는 무한의 대상에 대해 신비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무리수로 나타나는 황금비례는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원리를 생각하면 더욱 오묘하다. 황금비례는 짧은 선분(a)과 긴 선분(b), 짧은 선분과 긴 선분을 합한 전체(a+b) 등 세가지 대상이 서로 비례가 같아야 한다.

즉 a:b=b:(a+b)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비례이다. 이 비례식을 의인화해 긴 선분이 짧은 선분에 대해 갖는 우월감과 다시 긴 선분이 전체에 대해 느끼는 열등감의 정도가 같아야 한다. 우리들의 삶에서도 같은 비유를 할 수 있다. 나의 자식, 나 자신, 나의 부모 등 3대 관계가 어떤 비례가 될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황금비례로 보면 내 자식에 대한 감정이나 내 부모에 대한 감정이 같아야 한다. 자식을 사랑하듯 부모를 섬겨야 한다. 이러한 이치는 자연, 인간,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절대자의 세계라는 3가지 비교대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면서 절대자의 세계에 대해 겸허함을 갖지 않는다면 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삶의 여러 상황에서 마주치는 대상과의 관계에만 집착하는 저차원적 삶을 살 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대상을 포함한 전체의 존재를 늘 생각해야 한다는 철학·정신적 깊은 의미를 황금비례는 보여주고 있다.

/박동수 의왕미술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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