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애송시에서 늘 수위를 차지한다. 시인 집단에서조차 가장 좋아하는 시로 꼽힌다. 가슴에 그냥 꽂히는 이런 구절 혹은 시가 지닌 다양한 함의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하다. 이름을 존재 전체의 의미로 확장하면, 한 존재에 대한 명명이자 호명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름이란 어떤 존재를 표상하는 중요한 징표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작은 에피소드가 되작여진다. 어떤 어른이 필자에게 “이름을 바꾸는 것도 선각 아니겠느냐”고 한 것이다. ‘자(子)’ 자에 내포된 식민 잔재 때문이다. 필자는 “그냥 그것을 인식하며 살겠다”고 했다. 실은 개명 절차가 복잡해 귀찮은데다 이름을 바꾼다고 존재가 달라지진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동안 필자를 알아온 사람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이름으로 계속 부를텐데 새로운 이름을 알려주면 얼마나 번거로울 것인가.
이름은 한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누군가는 필자의 이름에서 모습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언행을 생각하고, 누군가는 시 한구절을 연상할 것이다. 하여튼 이름은 하나의 존재 전체를 표상한다. 물론 이름이 바뀐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과 상관없이 실존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 석자에는 그동안 만나고 부딪쳐온 사람들과의 시간이 배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개명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름을 바꿔 부르고 바꿔 적어야 한다는 게 미안스럽다. 그러니 설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주어진 이름에 자신의 생을 담아갈 밖에.
사실 필자의 이름에서 풍기는 식민 잔재가 싫었고 지금도 첫 소개 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이름도 식민지라는 이 땅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보면 이를 양가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호미 바바에 의하면 양가성은 식민지인들이 식민 지배자를 모방하되 똑같이 닮지는 않음으로써 차이를 만드는 전략이다. 그런 흉내 내기에 따른 차이가 식민 통치자를 교란시키며 일종의 저항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자(子)’자 이름 역시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 탈식민주의연구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 갖다 붙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런저런 논의를 떠나 필자를 아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름을 고쳐 부르는 노고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그렇잖아도 바쁘고 고된 나날이니 말이다.
자신의 이름이 빛나기를 누구든지 바란다. 좋은 이미지로 오래 남는 이름이 되길 기대한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생각하면 다시금 마음 깃이 여며지곤 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삶 전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자신의 이름 하에서 나날을 성심껏 살아간다. 아니 그렇게 쌓인 삶이 한 이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소망들의 아름다운 함축이 바로 ‘꽃’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가끔은 ‘누군가의 꽃’이 되길 간절히 꿈꾸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정수자 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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