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풍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결승과 3·4위전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신문이나 방송은 온통 월드컵 얘기 뿐이어서 솔직히 짜증스럽기까지 했던 월드컵 열풍과 광란이 한국의 16강 탈락과 5일 일어난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뉴스의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실력의 현주소가 그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국을 2 대 0으로 꺾은 스위스는 16강에 진출했지만 16강전에서 곧바로 탈락하고, 한국과 비긴 프랑스는 16강전, 8강전에서 우승 후보 브라질을 이기고 준결승에서는 포르투갈을 누르고 결승에 오른 것을 보고 한국의 실력도 결승에 오르고 우승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데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아쉬워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 누가 더 강하고 센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와 비긴 프랑스보다도 우리를 2대0으로 이긴 스위스가 더 강하지만 객관적 전력 평가에는 프랑스가 한수 위이다. 결국 축구와 같이 많은 변수가 있는 경기에서는 누가 더 강하고 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얘기 될 수 없고, 상대적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브라질은 프랑스에 무릎을 꿇고 막강한 전력을 지닌 독일은 이탈리아에 손을 들었다. 천적이 있고 징크스가 있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결국 축구와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는 절대적 강자는 없고 오직 상대적 강자와 약자가 있을 뿐.
이 세상, 사회도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으며, 높은 사람과 밑에 사람, 귀하신 몸과 천한 자가 있다. 80년대 초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 우연한 기회에 연출가 몇 사람과 기자들 몇 사람이 술을 마셨다.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인 오 아무개는 주벽이 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날도 그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대통령보다 더 높은 사람이야, 그러니 내 앞에서 까불지 말라고…” 그의 주벽을 아는 사람은 또 시작이야 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처음 그를 만나는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너희들 대통령하면 꼼짝 못하지, 내가 그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이야!” 참다 못해 한 기자가 “당신이 어떻게 대통령보다 높으신 분이냐?”고 물었다. “청와대로 전화를 해 봐, 물어보라고, 대통령과 나 중 누가 더 높냐고…” 그리고는 병신 같은 놈들, 진짜 높은 사람을 몰라보는 바보들이니 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술판은 싸움판으로 돌변했다. 참다못한 한 기자가 주먹을 날린 것이다. “너 간첩 아니야?!” “청와대로 전화해 보라는데, 무서워서 전화도 못하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싸움을 말리느라 내 안경도 날아갔다. 싸움은 이튿날 술이 깬 다음에 청와대로 전화해 보기로 하고 일단 진정됐지만, 이제 생각하면 당시 군사정권의 절대적 권력 앞에서 한 어릿광대가 연출한 해프닝이었다.
봉건사회나 독재국가에서는 모르지만 민주사회에서는 절대적으로 높은 사람과 밑에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월드컵 같은 경기에서 강자와 약자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성이 우리 사회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누구나 이의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스승이요, 선생님이라 할 수 있는데 누구나 선생님이고 누구나 사장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높은 사람이라도 말하는 상대에 따라서 낮춰 말해야 하는데 자기한테 윗사람은 상대에게도 윗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한 연극인이 비록 주석에서 술이 취해 외친 말이지만 “내가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이다”는 말은 강하고 높고, 약하고 낮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외침이었다고 생각된다.
/김정옥 예술원 회원·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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