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창단동인으로 참가한 극단 자유가 창단 40주년을 맞는다. 창립공연으로 막을 올린 ‘따라지의 향연’은 뜻밖에 호응을 얻어 40년 동안 극단 자유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잡고 꾸준히 공연돼 왔다. 전용극장이 없어 연속적으로 공연되지는 못했지만 5년 또는 10년 간격으로 꾸준히 공연됐다. 아마 40년을 두고 한 극단에서 공연돼 왔으니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봐서도 최장수 공연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연 횟수나 관객 동원수도 한 극단의 한 공연으로는 최고 기록을 세웠으리라 생각한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동안 배역도 바뀌고 사회풍속도 많이 변했다. 이를테면 ‘따라지’라는 어휘를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른다. ‘따라지’라는 말은 원래 화투놀이에서 3+8=11 또는 5+6=11과 같이 10을 제하고 남는 한 끝으로 끝빨이 없는 사람, 하찮은 인생을 ‘따라지’ 또는 ‘따라지 인생’이라고 했는데 6·25 동란이후 38선을 넘어온 피란민을 ‘38따라지’라고 부르게 되고 정부가 국유지를 빌려주고 정착촌을 만든 곳을 해방촌이라 했다. 해방촌은 곧 판잣집촌이었는데, 이 해방촌에 사는 사람들이 삼팔따라지다. 50년대에서 60년대 그리고 70년대에 걸쳐 삼팔따라지의 판잣촌은 서울을 에워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따라지라는 어휘가 젊은 세대에게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참으로 인생무상을 실감케 한다. 어휘만이 바뀐 것이 아니다. 추송웅, 함현진, 장건일 등 따라지역이나 가짜 귀족, 벼락부자역을 감동적으로 연기했던 배우들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 배우만이 아니라 ‘따라지의 향연’의 무대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 관객들 가운데에도 돌아가신 분이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며칠전 60년대 라디오 드라마의 스타 고은정씨를 만났는데 나는 40년전 ‘따라지의 향연’에 어린 꼬마로 출연한 아들 소식을 물었다. 그는 지금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의 부원장으로 재직중이라 했다. 어머니 고은정씨 말로는 아들이 꼬마역으로 출연한 이후 때때로 무대에의 향수를 얘기해서 아들의 진로에 대한 갈등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그가 영상대학원 교수로 있는 것은 40년전 무대출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번 40주년 기념무대에도 꼬마 ‘빼빼니애로’가 출연한다. 앞으로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라 했다. 소년이 실제로 영화감독이 될지 또는 다른 직업을 갖게 될지는 모르지만, 무대 배우로서의 체험은 일생 그를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연극과 인생은 별개의 것이지만 사촌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지의 향연’ 주제라 할 수 있는 ‘빛과 그림자’, ‘부귀와 가난’도 결국은 앞과 뒷면을 이루는 하나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어 부귀를 누리는 자가 있다. 그러나 ‘진짜 가난과 가짜 귀족놀이’에 지친 따라지들에게도 꿈은 있다. 70년대 유행가 ‘쨍하니 해뜬날 돌아 오련다’는 따라지들의 허세였지만 동시에 꿈이었다. 연극은 어렵고 힘든 세상에 웃음을 선사하고 꿈을 길러준다고 할까… 꿈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깨질 수도 있지만 꿈은 여전히 가난한 자, 약자에게 소중한 양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김 정 옥 예술원 회원·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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