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의와 기표라는 말은 평상시 일반인들 대화에선 자주 쓰지 않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기호 속에 기의와 기표가 결합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청년이 처녀에게 장미 꽃을 건넸을 때 장미는 단순한 꽃이 아니다. 청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장미를 기표라고 하고 사랑을 기의라고 한다.
이런 청년의 속 마음인 사랑을 모르고 단순히 장미만 예쁘다고 한다면 얼마나 바보 같은 경우인가. 지금 우리 사회가 마치 이런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질은 외면당하고 미디어에 의해 눈에 보이는 찰나적인 것에만 빠져드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유명한 광고 카피가 다시 생각나는 경우이다.
정치인들은 감성과 이미지 가꾸기에만 몰두하고 유권자들은 기분학상 호감에만 의존하면 결국 훗날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환경옹호론자로 이미지화하면 얼마나 그럴듯 해보이는가. “나는 환경옹호론자인데 당신은 환경파괴자”라고 몰아붙이면 누가 당해 낼 수 있는가. 그러나 책임있는 위치에 서면 이미지보다 타당성이 우선한다. 당연히 公約이 空約이 되는 것이다.
서양사회는 0, 1, 2 등을 써 디지털사회를 만들었다. 인류에게 이처럼 편안한 안락을 제공하는데 서양의 이분법은 기여했다. 그러나 흑과 백, 밤과 낮, 적과 동지란 합리적인 구분은 했을지 모르지만 동양철학이 강조하는 기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선과 악, 재벌과 서민, 민주와 반민주, 정의와 불의란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어떻게 통합을 말할 수 있고 미래를 말할 수 있겠는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얼만큼 고뇌하는가 하는 기의는 뒤로 하고 화려한 말과 제스처를 멀티미디어를 통해 확대 재생산하는 능력만이 우선시되는 사회라면 그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과 무책임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이름하여 위대한 민주시민의 몫인 것이다. 세금을 내는 주인이 오히려 봉이다.
어느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셨다. 누가 산과 물을 모른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속의 깊은 뜻을 각자가 헤아릴 수 있는 화두를 주셨다고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좀 더 깊이가 있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앞으로 달려 가는가. 현란한 구호와 아우성 속에 개인은 무엇을 얻는가. 장미보다는 그 속에 들어있는 사랑에 눈뜨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김용수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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