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주일동안 일간지에 자주 등장한 단어는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였다. 일본의 교육정책 변화에 대한 기사를 전하는 과정에서 주요 일간지가 단어의 의미를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다. ‘제로 톨러런스’란 ‘무관용주의’로 해석되고 있고, 학교교육에서 아무리 작은 잘못이나 규칙위반이라도 엄격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교육정책이론이다. 뉴욕 경찰의 ‘깨진 유리창(Bbroken Window)’이론을 교육에 적용했던 미국 클린턴정부의 교육정책이며 이제 일본의 교육정책으로 도입되고 있다.
‘제로 톨러런스’가 형식적으로 엄벌주의나 일벌백계와 같은 궤도에 있다는 점에서 학교교육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논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사들마다 용어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정작 따라 붙었어야 할 정책에 대한 분석은 그리 세세하지 않았다. 일부 보수적 논조의 신문들만 우리 교육계도 참고해야 한다는 정도의 짧은 언급이 있었을뿐이다. 자주 규율을 어기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들을 나무에 비유하자면 반듯하게 자라지 않은 굽은 나무일 것이다. ‘제로 톨러런스’는 전체 숲과 곧은 나무 성장을 위해 굽은 나무는 무조건 솎아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스로 곧은 나무를 닮은 자녀를 뒀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에겐 너무도 당연하고 바람직한 교육정책이다. 더욱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교내 폭력과 일탈현상 등이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알맞은 상황이기도 하다.
굽은 나무때문에 곧은 나무 생장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숲의 모습이 어수선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들이 굽은 나무라고 모두 솎아내기만 할 요량이면 무엇을 위해 교육이 존재하는지 의문스럽다. 교육은 단지 가르치거나 규제하는데 본질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잘못 자란 나무의 굽은 가지를 펴주는데 본질적 의의가 있고 거기에 교육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성과주의에 급급, 본질을 놓치면 교육의 백년대계는 백년하청이다.
여행을 즐기는 필자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많은 것들을 읽고 깨닫는다. 특히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요즘에는 저마다 다른 색상과 모양의 조화가 무엇보다도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의 극치임을 절감한다. 연녹색과 짙은 초록, 거기에 검붉은 단풍나무까지, 크거나 작거나 곧거나 굽은 나무들이 뒤섞인 자연의 풍경은 생동감과 다양함 그리고 조화로움이 자못 신비로울 지경이다. 굽은 나무를 솎아 내기보다 수고롭지만 굽은 가지를 펴주는 일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조화를 찾아가는 일이 될듯하다.
/이정진 오산대 이벤트연출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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