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기 좋은 철이다. 미풍이 잘 어울리는 꽃과 신록의 눈부신 날들. 이때문에 저녁이면 수수꽃다리 아래로 신록 아래로 마음이 먼저 가 거닐곤 한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마냥 걷다 아는 이를 만나면 아무데나 앉아 아무런 얘기나 해도 편한 좋은 날들이다. 그렇게 아무 길이나 들어서도 좋은 산책을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자주 누리고 싶다.
좀 쉬고 싶을 때쯤 무슨 요깃거리가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담한 전시회나 음악회, 연극 같은 게 없을까. 마음먹고 예매하고 나서 보는 큰 공연도 좋지만 가끔은 지나던 길에 어떤 프로그램에 끌려 낯선 것들과 만나고 싶다. 그런 게 상시 공연이나 전시가 갖는 힘이 아닐까. 그 근처부터 행복해지는 곳, 아름다운 산책로에 좋은 공연을 겸한 서울의 덕수궁 길이 그런 문화공간일 것이다. 수원의 화성 주변 역시 최고의 산책길로 꼽히지만 문화적으로 맛있는 산책을 하기엔 까마득하다.
돌아 보면 우리가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은 늘 부족한 느낌이다. 무슨 ‘전당’이니 하면서 잔뜩 힘주지 않은 소박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이웃같은 문화공간은 많을수록 좋은데 말이다. 물론 건물만 그럴듯하게 세워놓고 내용이 없는 건 곤란하다. 하드웨어만 앞세운 탓에 그런 조짐을 보이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인구 100만명이 넘는 수원에 갤러리다운 갤러리 하나 없다는 건 너무 초라하다. 예술영화 전용관 하나 없는 것 역시 문화 저변의 빈곤이나 왜곡 등을 낳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현실에서 보듯, 우리의 문화적 욕구는 아직도 계속 뒤로 밀리고 있다.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은 그 열매를 단기간에 따먹을 수 없다. 그래서 장기적인 안목의 인프라 구축이나 투자가 더 절실하다. 도내 부천, 안산, 성남, 일산 같은 도시가 공연장을 늘리고 그 역할이나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게 확장하는 등 선례를 보여주기는 한다. 하지만 가까운 데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공간은 여전히 미흡하다. 이러한 사정은 사실 시민들의 문화 향유권을 앗기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좋은 문화예술을 향유하려면 시민들이 더 나서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우는 아이 젖 준다’고 위정자들에게 그 중요성을 자꾸 환기하는 게 필요한 것이다.
문화공간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도시들은 편안히 걷고 싶은 길도 별로 없다. 끊임없이 부수고 파헤치고 다시 짓는 증·개축의 ‘공사중’인 이 땅에서 호젓한 추억의 장소는 다 사라져간다. 마을이 사라지는 지금 담장 너머로 부침개를 주고받던 이웃이나 골목의 기억은 책 속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 간절히 생각해본다. 문화공간이 소중한 기억의 장소가 돼야 한다고. 일을 찾아 집을 찾아 혹은 즐거움을 찾아 시도 때도 없이 떠도는 현대인들에게 문화공간이 신명나는 삶터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이다.
동네 공연이나 전시 등의 좋은 기억들은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그뿐인가. 좋은 문화공간은 주민을 밖으로 이끌어 내고 서로 손잡게 해준다. 바로 그곳의 ‘시민들을 위한, 시민들에 의한’ 문화공간이 더불어 즐거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문화공간으로의 맛있는 산책을 늘 기대한다. 그런 산책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 이웃들과 한 하늘 아래 산다는 게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정 수 자
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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