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어느 민중벽화 이야기

딱 21년 전 얘기다. 같은 학교에 불어 교수로 재직중인 뽕세신부 소개로 공주교도소에 여자 수감자 한명에게 그림을 가르치려 드나들었다. 그러다 교도소장인 염 소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는 미술선생인 필자에게 “환경미화용 그림을 좀 줄 수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그때 필자가 한창 길거리벽화를 연구하고 있을 때여서 그에게 “실내에 환경미화용 그림 몇점 거느니 교도소의 벽에 내가 벽화를 직접 그려 주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설득용으로 외국의 사례들을 슬라이드쇼를 해가면서 말이다. 염 소장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벽화를 그릴 벽을 선택하고 거기에 그릴 그림 계획(안)을 내달라”고 요청해 왔다.

작은 운동장이 있는 교도소 안 길이 30m 내벽을 선정하고 사업하는 선배를 통해 들어가는 일체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모내기를 하고 있는 들녘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참을 이고 가는 봄 풍경, 그녀가 지아비를 빨리 해방시켜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지아비는 석방되는 용꿈을 꾸고 있는 여름, 그 지아비가 석방돼 들녘에서 수확한 추수거리를 가지러 오는 가을 장면 등을 담은 벽화의 밑그림을 완성했다. 같이 작업할 공동작업단으로 미술교육과 학생들과 그림을 그린 경험이 있는 재소자 2명을 포함해 10명 정도가 구성됐다. 방학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7월에 다 마치는 것으로 일정표를 짰다. 모든 계획을 완료하고 뜨거운 여름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벽은 작은 운동장을 가로 질러 문제(?)의 재소자들을 가두는 독방들이 배치돼 있었다. 매일 아침 우리가 출근할 때면 이중 한방에서 인사를 겸해 누군가 큰소리를 내 뱉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 아무갠데요. 교수님 그림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그림입니다.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어느 사이 한 사람의 훌륭한(?) 관객을 확보한 셈이다.

어느 날 그는 좀 색다른 주문을 해 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교수님 그 여자 얼굴 좀 예쁘게 그려 주세요. 그리고 이왕이면 치마를 좀 짧게 그려 주세요.” 거의 주문 생산수준이다. 좀 너무한다 싶기도 했지만 0.9평에 갇혀 있다는 교도관의 말을 듣고 보면 이해도 갔다. 답답했던 그에게 그래도 우리의 벽화는 유일한 희망이자 위안이 아니었을까.

10년 쯤 뒤 소설가 황석영이 공주교도소로 이감을 와 면회를 갔다. 그와 면회를 끝내고 벽화를 보러 갔다. 몇년 전부터 시멘트 블록 벽이 너무 험해 에폭시 밑칠이 들고 일어나 그림 표면에 균열이 가고 떨어져 나가 모양이 흉하거나 마지못해 벽화로 존치시켜 놨겠다 싶어 별로 기대하지 않고 벽화 있는 데로 안내를 받아 갔었다. 그런데 그 벽화는 그대로 잘 살아 있었다. 많은 덧칠을 했고 새로운 화공(?)을 불러다 사람 얼굴은 간판 그림 그리듯 입체감을 살려 놓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이 벽화를 손대고 덧칠하고 또 바뀐 그림들을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을 것이다. “제일 처음 교수가 그렸을 때보다 그 여자 얼굴 훨씬 잘 그렸구먼…”이라고.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한 벽화가 어떤 사연을 갖고 태어나고, 어떻게 하다 병들고 늙어가다 죽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러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감상되고 하는 이런 공공성을 띤 벽화가 바로 민중벽화가 아니겠는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공주교도소 벽화 이름은 ‘꿈과 기도’였다.

/김 정 헌

화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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