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내 사랑, 당신 앞에 전율하며 서 있게 해주세요.” 수메르 점토판에서 발견됐다는 이 시구는 지금 봐도 놀랍다. 풍요와 다산을 비는 종교의식 후 여흥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4천년 전 누군가의 몸짓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게다가 “침실로 데려가줘요”라는 또 다른 구절은 “날 가져봐”하는 요즈음의 가요 이상으로 직접적이고 당돌하다.
사실 이런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사뭇 떨리고 애틋하고 안타깝고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을 말이 아니면 무엇으로 또 세세히 전하랴. 더욱이 사람은 무엇이든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족속이니, 그 모든 것을 말로 하고 글로 새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뇌기 좋고 전하기 좋은 말이 시가 되고 사랑이나 주술 등 모든 기록의 시초이자 원전이 시로 남은 것이리라. 그런 여정을 돌아보면 시의 힘은 실로 무궁한 바가 있다.
그렇지만 시의 힘이 갈수록 미미하다. 오랫동안 시 중심이던 판이 소설에 이어 영상으로 중심을 옮겨간 것이다. 그러나 시가 사라진 적 없고 예술의 성감대임을 포기한 적도 없으니, 시는 계속 살아 남아 소임을 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시대를 앞서가는 예언도 하고 잠든 세상을 깨우기도 하고 다친 속 맺힌 속을 풀어주는 일들을 계속할 것이다. 미약한 대로 누군가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삶을 어루만지며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로 인해 세상도 구원의 꿈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시의 오랜 힘이려니, 무용(無用)의 유용(有用) 아니겠는가. 시는 현실적인 쓸모 없으므로 인해 더 오래 산다. 무릇 예술이 그러하듯, 무용(無用)이 오히려 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힘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시는 바쁘고 즐거울 때보다 힘들고 외로울 때 말을 걸어온다. 실연 뒤면 모든 가요가 내 마음의 노래이듯 말이다. 하여 시시각각 피어나는 봄꽃들 앞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길 다시 꿈꾸곤 한다. 간혹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하기를 바라거나,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산꽃을 애틋이 돌아보다가, 문득 마음에 꽃물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가끔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에 기대어 고단한 이승을 건너가는 것이다.
이렇듯 시는 두고 온 그리움만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갖고 있다. 세상을 한결 아름답게 만드는 은근한 힘을 지니고 있다. 수업시간에 시를 띄워 놓으면 금방 촉촉해지는 학생들 눈빛이나 4천년 전 점토판에 잠자던 사랑이 새삼 회자되는 것 역시 시의 힘을 보여주는 예다.
그러니 현대시가 난해하다고 멀어진 사람도 이 봄에는 좋아하는 시부터 다시 찾아보길 권하고 싶다. 시와 더 친해지면 시심을 갖고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시와 노닐다 보면 무미한 나날도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시를 통해 자기 정화나 승화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시는 이러한 전율을 늘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시는 자신 앞에 전율할 오직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도 산다. 먼지에 파묻힌 시조차 항상 누군가의 영혼을 향하고 있다. 시를 쓴다는 건 그래서 외롭지만 황홀하다. 어느 영혼과의 만남을 꿈꾸는 봄날, 저 꽃들과 더불어 전율할 시들이 그립다.
하여 4천년 전 점토판의 시구처럼 외쳐본다. 시여, 전율하라! 새로운 언어의 꽃으로 세상을 더 깊이 전율케 하라!
/정 수 자 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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