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의 남자’가 연일 화제다. 관객이 1천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수십 번 본 마니아를 비롯해 10대에서 중·장년까지 관객층도 다양하다. 영화가 그만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한 때문일 것이다. 그뿐인가. 영화 바깥에서도 패러디나 유행어 등을 만들며 신나게 놀고, ‘이준기 현상’을 비롯한 사회적 현상이나 새로운 문화 담론 등을 낳기도 한다.
역시 오늘날 가장 활발한 문화담론의 장은 영화판인듯하다. 그만큼 영화는 대중문화의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긴 벤야민의 예견대로 20세기부터 기술의 무한복제인 사진의 시대가 열렸으니, 영상의 힘은 갈수록 세어질 것이다. 그런 판이니 영화를 모르면 웬만한 대화에 낄 수가 없고 젊은 층과는 교감을 포기해야 할 정도다. 수업중에도 책이 아닌 영화를 예로 들어야 이해나 소통 등이 쉬워지니 말이다.
앞으로도 영상은 그렇게 문화의 중심에 설 것 같다. 사학이나 철학 같은 근엄한(?) 학문에도 영화가 깊이 들어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영화는 대중적인 전파력도 막강해 문화이자 산업으로서의 부가가치가 다른 장르들을 압도한다. 이때문에 영화를 경제논리로만 접근해선 안된다는 주장이 거듭 나온다. 최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 따르면 국민 75.6%가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방침에 반대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이런 여론은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주권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스크린 쿼터제도는 문화주권이나 문화다양성 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유네스코는 문화다양성이 현재와 미래세대 구성원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상호 작용하기 위한 필요수단임을 천명했다. 문화다양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창조의 바탕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세계화에 따른 문화 획일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이미 세계 영화시장을 장악한 할리우드는 더 큰 독식을 위해 자꾸만 수를 쓴다. 가히 스크린을 통한 세계 지배가 아닌가. 이 막강한 독식을 막지 않으면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적 팽창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런 중에도 한국 영화가 이만큼 자란 건 다행이다. 물론 영화인들의 공로지만 관객의 사랑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영화판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아직도 과제가 많은 것 같다. 취약한 시스템이나 돈 되는 영화만 살아남는 등 문제들이 산적한 것이다. 이런 영화판의 구조에는 관객들의 책임도 있다. 그동안 관객들이 주로 재미나 볼거리에 쏠렸기 때문이다(‘왕의 남자’의 경우는 좀 다르다지만 쏠림현상은 여전하다). 관객의 편식은 영화판의 편중과 왜곡을 재생산하고 흥행 위주의 시장을 공고하게 한다. 그러면 관객이 없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등은 살아 남을 수 없다. 결국 작품성 높은 외국영화를 당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독식 혹은 편식 등의 구조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우선은 약간의 개입, 즉 정부의 지원으로 가능할 것 같다. 정부가 대도시에 전용극장 하나씩만 지속적으로 지원해줘도 실험영화나 예술영화 등 돈과 거리가 먼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면 다양한 영화들이 더불어 살게 되고, 그것을 고대하던 관객들의 갈증도 해소될 것이다. 나아가 어느 판에도 좋은 문화공간을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든 다양한 문화와 더불어 놀 수 있는 곳, 그곳으로 종종 놀러가고 싶다.
/정 수 자
시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