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두고 보자’론(論)

우리 속담에 ‘두고 보자는 양반 무섭지 않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뒤가 무른 사람에게 흔히 쓰인다. 순발력이 뒤지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물론 나중에 어떻게 하겠다고 미리 말만 하는 건 소용없다는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하지만 이 말은 대체로 마음 약한 사람의 위기 모면용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두고 보자’고, 입술을 깨물며 물러선 경험들도 누구나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센 상대가 있고 들이받거나 넘어서기 곤란한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사실 상사나 선배 혹은 동료라도 대단한 강적이라면 화가 치솟고 약이 올라도 일단 꼬리를 내리는 게 보통사람의 방식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사람과 똑같이 뜰 수 없을 때 또한 그렇다. 그때 무른 사람은 ‘두고 보자’고 힘없는 협박을 한다. 아니 혼잣말을 되뇌곤 한다.

그런 언행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 때론 비겁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무섭지 않다’는 빈정거림이 따라다니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그건 ‘두고 보자’에 숨겨진 또 다른 힘을 무시한 선입견이다. 쓰디 쓴 눈물을 삼키며 한 다짐을 자위로만 끝내지 않고 계속 다져간다면 그게 대기만성으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두고 보자’를 면피용이 아닌 진정한 도약의 지렛대로 삼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거듭 속다짐을 하는 것이다. 단전에 힘을 주면서, ‘그래, 두고 보자!’고 말이다. 삶은 때로 이런 자신과의 약속으로 나아간다. 일찍이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고 말했지만, ‘두고 보자’ 역시 자신을 키우는 힘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냉철한 자기 진단이 전제돼야 한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후하거나 약한 사람은 자기합리화에 빠져 안주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처럼 오로지 복수의 칼을 가는 게 아닌 한, ‘두고 보자’며 자신을 다지는 건 삶의 큰 동력이 된다. 상처가 오히려 자신을 기르는 자양인 것이다. 그야말로 물러나되 더 크게 나가는 격이다.

이같은 뚝심이 이즈음 문화판에서도 절실하다. ‘너 그렇게 했지. 난 다르게 해 보겠어. 두고 봐’하는 식의 함부로 들뜨지 않는 뱃심 같은 것 말이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쉴 새 없이 뒤섞이는 유행의 회오리 속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왕이면 이런 흐름을 잘 타면서 살아남기도 하려니까 문화판도 덩달아 조급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영화가 히트하면 아류가 금세 범람한다. 하지만 얄팍한 베끼기나 짜깁기는 1회용 소모품에 불과하다. 진정한 고수는 오직 진검승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다.

한해가 저물고 있다. 올해 거둔 게 신통찮거나 누구에게 진듯한 사람은 자책을 딛고 다시 단전에 힘을 줄 일이다. ‘두고 보자’고, ‘내년에 멋지게 갚아 주리라’고 말이다. 이렇게 멀리 내다보며 자신이 택한 길을 꿋꿋하게 가다 보면 누구든 대기만성의 명품을 만들지 않을까. 그래서 ‘두고 보자는 사람도 꽤 무서운 걸’이란 말이 나오면 고정관념을 통쾌하게 뒤엎는 것이다. 이런 전복이 늘수록 우리네 삶이나 문화판에도 새로운 신명이 생길 것이다. 새해에는 홀로 깊되 함께 넓어지는 뿌리 깊은 나무가 많아지는 멋진 판을 꿈꿔본다.

/정 수 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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