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이제는 문화교육이다

나에겐 목사님 조카가 있다. 그는 지금 목회를 하고 있는데 그가 처음 미국에서 돌아와 아주 잘한 일이 하나 있다. 자기애들을 학교 들어가기 전에 글자를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다. 주로 마음껏 뛰어놀게 했다. 나한테 손자뻘 되는 이 어린이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 그림책을 보더라도 글자를 모르니 주로 그림을 열심히 보게 됐다. 그래서 카드 짝 맞추기 같은 놀이에선 이 어린이가 아주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됐다. 문자에 매달리지 않음으로써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와 색채 등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어린이는 취학 전 강요된 글자 배우기에서 해방됨으로써 뛰어난 형태와 색채지각력을 갖게 된 것이다.

생후 몇개월 된 갓난 아기 때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고 두꺼운 종이로 만든 그림책을 읽어준다. 이렇게 엄마의 글 읽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고 책과 책 속에 있는 형태를 보고 그림책을 손이나 이(齒)와 혀 등으로 느껴 본 아이는 반드시 커 책과 함께 일생을 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영재교육과 북스타트운동(갓난 아기를 처음 보건소에서 예방접종할 때 책 꾸러미를 주어 엄마들이 이 책들을 읽어 주도록 해 아이들이 책과 친숙해 지도록 하는 영국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우리나라에선 ‘책읽는 사회문화재단’이 이 운동을 시작했다)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감각기관들을 갖고 태어나는데 이러한 감각기관들에 의한 감각능력(판단력과 상상력)은 부모들의 양육이나 학교의 교육에 의해 개발될 수도 있고 오히려 퇴화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능력들은 어린이들이 취학하면서부터 서서히 체계적으로 상실돼 간다. 예를 들면 아동들이 미술학원에서 선생님들에 의해 거의 비슷비슷한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경우다. 창의력을 기르는 게 아니고 상투적인 형식을 강요함으로써 아이들이 갖고 있는 감각능력들이 발휘되기도 전에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4년 전 ‘문화연대’가 시작한 ‘문화교육’운동은 이처럼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감각기관에 의해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감성능력들이 학교교육이란 제도교육 틀에서 상실돼 끝내는 우리가 문화사회로 이행하는 것을 가로 막는 현재의 교육제도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교육이념으로 제안됐다.

입시중심교육에서 비롯된 ‘교실붕괴’와 ‘학교붕괴’를 우리는 입버릇처럼 외치면서도 또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 사회가 ‘20 대 80’의 양극화 사회로 가거나 또는 ‘사회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전조 임을 알면서도 교육에 관한한 하나님도 해결할 수 없다는듯 다들 손들을 놓고 있다.

이미 프랑스같은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문화교육이나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문화부와 교육부가 협의, 예술교육을 학교교육의 기본과목으로 못을 박아 놓았다. 우리나라도 이 문화교육과 관련,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됐다. ‘문화연대’가 끊임없이 주장한 문화교육을 문화부가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문화부 안에 문화예술교육과를 신설하고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만든 것이다. 문화부는 이를 시민들의 문화향수권의 신장을 위해 만들었지만 한 정부 부서 안에 이러한 직제 신설과 이에 따른 활동은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교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교육부는 아직도 문화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경쟁력만을 강조하는 맹목적 ‘지식기반사회’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유감이다.

이러한 무한 경쟁의 위험사회에서 우리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교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화교육이다.

/김 정 헌

문화연대 공동대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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