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는 언뜻 낡고 뒤처진 느낌을 준다. 한편으론 오래된 친구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술로 치면 와인같은 숙성과 기다림이 배어든 말이라고 할까. 어쨌든 절제는 귀가 닳은 갓이나 가방, 보풀이 인 스웨터 등처럼 인내의 느낌을 풍긴다.
그런데 이런 절제가 사라져 가고 있다. 옷 한벌로 사철을 나는 학자는 옛이야기가 됐고 신기료장수 등도 풍속사의 연구 대상일뿐이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대에 맞춰 너나 없이 치장에 바빠진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따져 보면 한사람이 사용하는 화장품과 헤어 제품 그리고 샴푸나 세제 등이 수십가지나 된다. 옷, 구두, 가방 등을 제외하고도 그렇게 많은 것들로 우리는 날마다 씻고 바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절제를 내세우는 사람을 근천스럽게까지 보는 세태가 됐다.
그뿐인가. 문화 전반의 무절제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현상은 무엇보다 무한자유로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는데서 비롯되겠지만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경향도 한몫하는 것 같다. 영화는 노출의 상한선이 사라진 지 오래고 폭력의 강도도 날로 세어지고 있다. 피를 들이 붓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아 사람 죽이기를 게임하듯 즐기고 팝콘을 맛나게 먹으며 그런 장면을 보는 관객도 엽기적인 문화에 일조를 한다. TV 프로그램 역시 볼썽 사나운 ‘까발림’의 수위를 계속 높여 간다. ‘내숭’이 젊은이들의 혐오 0순위이기 때문이다.
거침이 없는 이런 분출은 ‘디오니소스’의 부활을 환기한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적 세계, 즉 이성 중심의 세계를 해체하면서 부각된 이즈음의 중요한 문화코드다. 절대적인 힘을 누려온 중심들에서 소외된 주변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것이다. 물론 그런 변화가 진정한 다양성의 힘으로 예술이나 삶 전반에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중심이 너무나 많은 주변의 억압을 먹고 컸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여성 억압의 효율적 수단이자 교묘한 인권 유린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면 중심의 횡포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절제란 시대착오적 요청일지도 모른다. 절제가 억압 혹은 억제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억제는 강제적인 억압과 달리 의식·의지적인 것으로 자발성을 갖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에는 이런 억제, 즉 ‘넘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한 우리의 전통이 스며 있다. 적절한 선에서 멈추는 것, 그것이 일상의 철학이자 미학적 추구였던 것이다. 특히 절제는 시나 그림 등에서 할 말을 최대한 줄이고 대상 자체가 말을 하도록 하는 중요한 기법이자 태도였다. 바로 그 정점에서 여백의 아름다움이 구현된다. 이러한 절제가 다시금 절실하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절제라니, 공허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즈음의 무한 욕망과 무한 분출을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 삶은 더 황폐해진다. 무절제 폐해가 당장 자연의 보복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렇다고 ‘디오니소스’같은 분방한 표출을 모두 부정하는 게 아니라 지나친 ‘까발림’이나 폭력 등의 수위를 조절하자는 것이다. 똑똑한 소비자들이 시장을 바꿔가듯, 일상에서도 작금의 속도와 표현 수위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청빈한 삶으로 돌아갈 순 없다. 하지만 조금씩 절제를 해나가는 건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삶의 전반에서 절제를 되찾아 갔으면 싶다. 다 벗은 몸보다 살짝 가린 몸이 아름답듯, 예술의 풍격도 절제에서 나온다. 그동안 방기했던 절제를 이젠 찬찬히 챙겨보며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정 수 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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