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여백의 아름다움

한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다 보면 문득 붓끝이 닿지 않은 하얀 여백에 눈길이 머물 때가 있다. 어떨 땐 그 여백에다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여백을 응시하기도 한다. 짧은 순간이지만 마음이 포근해지고 근심도 사라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여백’이 넉넉한 수묵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가끔 절친한 친구들중 문화예술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물어 오는 경우가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공연을 볼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공연장이나 전시회에 갈 돈이 있으면 차라리 외식을 하거나 유행하는 옷을 사겠다는 식이다.

지난 여름 프랑스 아비뇽축제를 처음 접한 필자로선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축제에 참가한 공연수가 800여건에 이른 점도 놀랍지만 공연 관람객 계층이 부자부터 가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공연을 즐긴다는 점이었다. 호텔 사장도, 청소부 아저씨도 공연 한 작품을 보고 나면 다른 공연을 보기 위해 열심히 축제팸플릿을 훑어 보는 모습을 보면서 ‘이토록 이 나라가 공연관람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의문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생각의 여유로움이 있었다. 즉 “밥만 먹고 살 수 없지 않느냐”나 “관람료가 다소 비싸더라도 영혼(정서)을 정화시킬 수만 있다면 오히려 공연관람이 더 싼 게 아니냐” 등이 여유로움의 골자이다. 우리와 정서적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숨가쁜 일상에도 여백을 남길 줄 아는 그들의 넉넉한 생각이 몹시 부러웠다.

어느새 12월을 맞았다. 올 겨울 경제가 이런저런 연유로 몹시 힘들 것이라는 진단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은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수목 한계선에서 비바람 맞으며 겨우 웅크리고 있던 나무로 만든 것임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다소 어렵고 힘들더라도 건강하게 올 겨울을 이겨내자. 적당한 운동도 좋고, 공연관람도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도 이달엔 올해 세계 최고 화제작 탭덕스(Tap Dogs)를 비롯, 가슴 속에 맺힌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 보낼 수 있는 공연들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튼 고도원 시인의 표현대로 ‘올 한해 아픈 추억이 있었다면 툴툴 털어 버릴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두 철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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