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한 도시가 디자인계의 최신 주제라고 한다. 이는 ‘유니버설 디자인’, 즉 ‘평생 디자인’으로, 더 편하고 안전하고 풍요롭기를 원하는 욕구의 반영이다.
사람을 섬기는 도시라니, 상상만 해도 즐겁다. 그동안 보아온 도시의 모습이 자동차나 건물 위주인 데다 속도 혹은 편의를 너무 앞세웠기 때문이다. 속도의 추구는 먼저 길을 모두 직선으로 바꿔 놓았다. 산을 뭉개고 집과 논밭을 헐면서 낸 직선도로들은 발전의 동력이자 상징이 되었다. 그 덕분에 주변의 건물들 역시 딱딱한 직선 일색이다.
이러한 직선에 비해 곡선은 효율성이나 편의성이 훨씬 떨어진다. 구부러진 길들이 어찌 일직선으로 뻗은 고속도의 쾌적한 빠름을 당하겠는가. 하지만 ‘직(直)’은 ‘곡(曲)’의 부드럽고 겸허한 포용을 당해낼 수 없다. 이는 그간 직강화한 하천을 다시 곡강의 자연하천으로 바꾸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의 구불구불한 샛길들이 걷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어쨌든 도시 곳곳에 곡선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곡선은 수직선과 직각 위주의 거리를 한층 부드럽게 한다. 이러한 곡선의 힘을 잘 보여주는 예가 가우디의 건축미학일 것이다. ‘곡선이 만드는 미로(迷路) 같은 구불구불한’ 가우디의 공간 이미지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상쾌하게 깨뜨리고 새로운 미적 체험을 제공한다. 울퉁불퉁한 벽이나 바닥을 상상하면 발바닥뿐 아니라 마음바닥까지 즐거워진다.
돌아보면 곡선은 우리네 전통 미학의 한 근간이었다. 화성(華城)도 이런 곡선미가 두드러진다. 화성의 아름다움은 여럿 들 수 있지만, 나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으뜸으로 친다. 물론 성곽에 한해서만 화성의 미학을 말하는 것은 화성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화성이라는 신도시 안에서 꿈꾼 근대라든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열었던 진찬연, 신분제사회에서도 상하 교섭을 도모했다는 낙남헌의 낙성연 같은 화성의 진정한 내용을 이루는 정신문화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역시 이어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성을 따라 걸을 때 내 가슴에 무엇보다 먼저 굽이쳐 오는 것은 성곽의 유려한 곡선이다. 높은 곳 낮은 곳을 두루 아우르며 자연의 흐름을 따라 구불구불 돌아가는 그 곡선의 아름다움이다. 굽이치듯 내리뻗고 끊어질 듯 휘어 도는 성곽은 완만하고 평화롭게 곡선을 그리며 자연스러운 격조와 아치를 한껏 펼쳐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둥그런 능선과 무덤, 조붓한 마을 안길이나 개울 혹은 다랑이 논의 구불구불한 곡선들을 닮았다. 그래서 성곽을 끼고 길을 걷다 보면 내 마음에도 어느덧 새로운 여유와 정취가 넘실거리곤 하는 것이다.
화성은 이러한 곡선의 조화로운 실현이다. 그 정신과 미학을 되살리고자 화성은 계속 해체 복원 중이다. 모든 걸 예스럽게 재현하는 건 우습지만, 곡선의 아름다움만큼은 좀 더 다양하게 담아내길 소망한다. 또한 골목이 사라진 시대에 이마 맞댄 처마들이 나날의 소리와 냄새를 주고받는 정겨운 동네를 꿈꾼다. 하여 박제된 도시가 아닌 이웃들의 온정이 넘나드는 저녁 한때를 느른히 걷고 싶다.
무릇 도시란 이렇게 주변 환경과 건물, 길들이 우리네 삶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할 것이다. 어디서든 자리만 펴면 소풍이 되는 그런 도시에서 산다면, 우리 모두가 서로를 위하며 한결 너그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정 수 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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