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 공공성이 가능한가?’는 사실 늘 나한테 던진 질문이다. 미술대학을 나와 작품을 팔아 세상을 산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미술선생으로 취직을 했을 때, 대학 때부터 품고 있던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문이 불신과 불안감으로 확대됐다. 미술가가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대학에서 배운 바도 없었지만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신화화 된 화가들처럼 그냥 가난과 싸우면서 창작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자신도 안 섰다.
그래서 나와 내가 만드는 작품들이 사회로부터 독립(?)당할까 늘 불안해했다. 60년대 70년대의 전시장에는 늘 미술인들끼리만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자축하고 몰려다녔으며 그리고 나선 으레 술에 떡이 되어 자기의 밀실로 흩어지는 것이 미술동네의 일상적 풍경이었다. 기껏해야 그 전시회의 주인공인 화가의 친지들과 가족들만 생일잔치에 오듯이 참석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사회로부터 완전 고립이었고 관객들로부터 완전한 소통두절이었다. 작품의 내용에 있어서는 화가 자신도 해독하지 못할 난해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 작가나 관객들은 작품내용에 대한 대화는 일종의 금기였다. 이러한 전시장 풍경에서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성 운운은 일종의 사치였다.
그런데 세월은 많이 흘러 미술 전시장에 미술인들만 북적거리는 옛날식 풍경을 미술동네에서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게 되었다. 인사동과 그 밖의 대형 전시장들에서 일반 관객들의 발걸음은 미술인들이 한가하게 서성대도록 가만 놔두지 않을 지경이다. 어쨌든 외형적으로는 관객과의 소통은 아니라 하더라도 전시장과 그 밖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접촉빈도수는 엄청나게 증가한 편이다.
예술은 상상력으로 포장한 ‘허구’임에 틀림없다. 작가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으로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허구’가 우리의 진짜 삶에, 우리의 세상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뒤엎기 까지 하는 것이다.
요즈음 정부에서 운영하던 관 체제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민간 예술인들이 주도하는 위원회 체제로 바뀌었다. 이름하여 ‘한국문화예술위원회’다. 나도 그 위원회의 11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위원회가 초기의 위원회의 비전과 목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예술이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합의한 것이 있다. 합의한 첫 문장이 바로 ‘예술이 세상을 바꿉니다’다. 이 문장은 예술가들로 구성된 위원들이 ‘예술의 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 이제는 예술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는 신념이 예술인들과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것이다.
예술이 아무리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진공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적어도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살아 있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움직이고 움직여야 한다. 그것은 사회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윙크를 보내는가 하면 충돌하기도 한다. 때로는 사회에 점잖게 신호를 보내는가 하면 참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입하기도 한다. 어쨌든 작가가 상상력을 빚어 만들어 낸 작품은 사회와 소통하기를 바라고 소통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바로 예술의 공공성이 생긴다.
공공성은 나눔의 미학이다. 삶의 지혜를 나누는 기술이다. 예술도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예술가들이 아무리 천재적인 상상력으로 그의 작품을 빚어 놓는다 하더라도 사회적 소통이 단절되었을 때는 그것이 자기 혼자 보는 거울에 불과할 뿐이다. 요즈음 공공성 자체를 목표로 하는 예술이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예술은 관객이 완성 한다’는 말도 예술의 공공성과 관련하여 새삼 되새겨 보아야 할 것 같다.
/김 정 헌
문화연대 공동대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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