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常平의 지혜

세계 어디에서나 각국 중앙은행은 나라 돈의 독점적 발행 권한을 갖고 있으며 이의 바람직한 운용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 돈의 바람직한 운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물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돈을 관리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통화량이 지나치게 늘면 물가는 상승한다’는 원리를 도출한 것은 근대 경제학의 주요한 성과에 속한다.

돈, 즉 통화는 실물시장 사정에 맞추어 공급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꼭 서구의 것만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런 인식의 분명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곡물의 수매와 방출을 통해 풍·흉년의 곡가(穀價)를 안정시키던 고려 성종시대의 관청 이름이 상평창(常平倉)이었다. 여기서 ‘상평’이라 함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을 줄인 말이니 경제학 시쳇 용어인 안정과 같은 개념이다. 상평이란 말은 다시 조선 중기이후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화폐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무릇 화폐는 물건에 비해 너무 흔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귀하지도 않게 발행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통화정책의 본령을 화폐명칭 속에 담아낸 지성. 돈을 상평이라 부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모든 사람들이 되새겼을 선조들의 물가안정 지혜와 인문학적 멋에 머리가 수그러진다.

이곳저곳에서 사회의 다원성과 복잡성에 관한 얘기가 흘러나온다. 더불어 불안정성에 관한 걱정도 빠지지 않는다. 일원적 가치와 체계를 지닌 과거 사회와 달리 안정의 개념이 다층적이고 상충적이어서 그 달성도 어려워졌으니 당연할 수밖에. 경제 분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시장경쟁력 강화와 빈부격차 완화, 저금리 유지를 통한 경기회복 지원과 금리인하를 통한 부동산가격 안정, 대기업의 견인역할 강화와 중소기업의 건실한 육성, 지역간 균형발전 필요성과 특정지역의 선도적 성장 불가피성 등 크고 작은 이슈를 둘러싸고 자기주장이 팽팽하다. 한 쪽 가치로 기울면 다른 가치가 훼손되는 상황이니 정책당국은 물론 각 경제주체들도 노심초사다. 과거에는 물가안정으로 충분하였던 경제 분야에서의 안정의 체계와 개념이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다의적으로 바뀌었다. 또 각 부문의 안정을 아우르는 총체적 안정의 조합 점이 그때그때 흘러 다니며 재구성된다는 느낌도 든다.

이미 천여 년 전에 상평의 개념을 확립함으로써 자신들 시대의 안정의 의미를 알고 그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었던 조상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이제 우리시대에 알맞은 다층적 동태적 안정을 아우르는 새로운 상평의 길을 열어야 할 때다./왕용기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왕 용 기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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