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은 남한강·북한강이 양수리 부근에서 서로 합류하여 팔당을 지나 용산의 남쪽을 흘러가다 파주를 지나온 임진강과 교하에서 합류한다. 쉼없이 흘러 가다가 개성지역을 지나온 예성강(禮成江)과 만나 최종적으로 강화만을 거쳐 황해로 들어간다. 자락이 넓어 정치적으로 내륙을 통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 경제적으로 물류체계를 원활하게 만들어 경제권을 형성시킨다. 거기다가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이 있고, 특히 남쪽으로는 예성강·임진강·한강이 하계망을 구성하면서 서해 중부로 흘러 들어가 경기만을 구성한다. 따라서 한강 하류를 장악하면 하계망과 내륙수로를 통해 한강 유역·임진강 유역·예성강 유역·옹진반도·장연군의 장산곶 등의 내륙까지도 통합시킬 수 있다. 또한 한강하구는 경기만을 통해 해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이며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이다. 그래서 먼 선사시대부터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열도까지 이어지는 남북 연근해항로의 중간기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 횡단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이다.
그래서 숱한 사람들과 존재들의 헤아릴 길 없는 사연들이 물방울 방울로 모인 삶의 터요 역사의 터이다.
고대에는 삼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나라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벌였다. 광개토대왕은 396년도에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면서 수군선단을 거느리고 한강수로를 직공하기도 하였다. 결국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그리고 673년에는 임진강의 호로하(瓠瀘河·연천지역)와 한강의 왕봉하(王逢河·행주 유역)에서 신라가 당군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왕건도 한강하구에서 성장한 강력한 수군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후백제를 제압하면서 통일을 이룩하였다.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은 이른바 한강가에 세워진 河港도시이다. 전국의 세곡이 조운선을 통하여 한강에 모였고, 도성내의 일반 생활품도 대부분 선박으로 한강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한편 근대에는 조선이 세계열강에 강제적으로 개항 당하는 과정에서 일부 모습을 드러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를 거쳐 2척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강의 난지도 앞을 지나 건너편의 염창항까지 진입하였다. 조선의 반격으로 양화진에서 한강 하류 쪽으로 퇴각하였다.
이렇게 활발하게 우리역사의 중심부에 있던 한강은 20세기 중반에 냉전 구도가 정착되면서 하류가 단단하게 얼어버렸다. 정전협정의 제1조 제5항에 따르면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강 기슭)이 다른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행에 이를 개방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형식적으로는 통행이 가능하지만 현실은 어떠한 선박이나 사람도 통항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한강 하구를 둘러싼 환경 등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남북의 맹목적인 군사적 대치와 긴장이 부분적으로 해소되면서 법적근거가 희박한 한강하류 통항금지는 머지않아 유명무실화될 수 있다. 1998년에 한강하구를 되살리자는 취지로 뗏목을 여러 척 만들어 하류 항해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번 27일에 한강하류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강하류에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를 한다. 남북의 분단구조와 정치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둔 아쉬움은 있지만 한강을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살려서 사람들과 물건들이 그리고 문화가 흘러가는 터가 돼야 한다. 한강하구를 통해서 세계로 나갈 수 있고, 모든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곳에 평화가 깃들면 동아지중해도 평화로워지고, 이곳이 열려 있으면 동아지중해의 전 지역이 열린다. 일종의 평화지역(PEACE ZONE)이다.
/윤 명 철 한국해양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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