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자본주의의 원리는 단순하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라. 이윤 추구를 최우선 가치로 두는 시장경제는 지난 200여년간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와 기술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원 고갈, 불평등, 기후위기라는 어두운 그림지가 짙게 드리워 있다. 특히 기후위기의 시계는 이미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 가전제품, 패션의류가 위기를 더욱 가속화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 배경에는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는 자본주의의 오래된 핵심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계획적 진부화란 기업이 의도적으로 제품의 수명을 짧게 설계해 소비자가 자주 새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생산방식을 의미하기도 하고(기술적 진부화), 제품이 고장나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구닥다리처럼 느끼게 만들어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새 제품을 찾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심리적 진부화). 스마트폰 카메라 위치나 베젤 크기 등 디자인을 변경해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고 교체 불가능한 배터리를 설계하거나 시즌마다 바지의 넓이, 패딩 길이, 새로운 립스틱 컬러에 변화를 주거나 1~2주 단위로 변화하는 패스트패션의 빠른 트렌드 등 기술적 심리적 수명을 동시에 단축해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자극해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찾게 만듦으로써 기업들은 소비의 속도를 높이고 이윤을 극대화했다.
이 전략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무한성장’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소비구조가 단순히 경제적 문제를 넘어 환경과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제품 생산에는 자원 채굴, 에너지 사용, 탄소배출이 필수적이다. 제품이 조기에 버려지면 전자폐기물과 플라스틱 쓰레기가 넘쳐난다. 패스트패션 산업만 해도 매년 수천만t의 의류가 버려져 쓰레기 매립지로 향한다. 자본주의의 무한성장 논리를 가능케 하는 계획적 진부화와 과소비는 기후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숨은 가해자로 작동한다.
이제 우리는 경제 시스템 전반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봐야 한다. 더 이상 ‘선형경제 (Linear Economy)’ 모델, ‘생산-소비-폐기’의 일방통행 구조로는 기후위기와 자원 고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안으로 ‘순환경제 (Circular Economy)’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순환경제는 제품의 설계 단계부터 내구성과 수리 가능성을 높이고 폐기물 최소화를 위해 재사용, 재제조, 재활용을 촉진한다. 단순한 재활용을 넘어 생산과 소비의 모든 과정을 순환 고리로 연결해 자원의 가치를 최대한 길게 유지하는 것이 핵심 개념이다. 르노자동차회사의 경우 프랑스 플린 공장을 리팩토리(Re-Factory)로 전환해 차량 해체, 부품 재사용, 배터리 재활용 등을 한데 모은 순환경제 허브로 활용해 연간 12만대 이상의 차량을 해체 및 재활용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이미 수리권(Right to Repair)과 제품의 재활용 의무화를 법제화하며 2015년부터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계획적 전부화의 유혹에 빠져 있다. 기업들은 ‘새로움’을 무기로 소비자를 자극하고 소비자는 최신 제품을 소유해야만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정부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EPR) 등 일부 제도를 시행 중이지만 강제력과 실효성 면에서는 갈 일이 멀다.
자본주의의 무한성장 신화를 이제는 재고해야 할 시점이다. 생산자는 내구성과 수리 용이성을 제품 설계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하며 ‘새것=좋은 것’이라는 신화를 내려놓고 ‘오래 쓰고 고쳐 쓰는’ 소비습관을 길러야 한다. 정부는 강력한 규제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계획적 진부화의 소비 덫을 끊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결국 우리 모두의 몫으로 돌아올 것이다. 기후위기의 경고음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이제는 무한성장의 메커니즘을 멈추고 순환경제로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사회 전반에 걸쳐 신속하게 뿌리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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