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영화 ‘서편제’ 보며 국악 입문 ‘이날치’ 출신·화제작 ‘정년이’ 소리감독까지 국악매력 세계에 알리고 대중화 앞장 “판소리, 전통 지키며 사랑받도록 노력”
민족 고유의 정서 ‘한’을 녹여낸 영화 ‘서편제’를 보고 자라난 어린 소녀는 어느새 30년 차 소리꾼이 됐다. 국악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간 권송희(38). 그녀는 그룹 ‘이날치’ 멤버로 “범 내려온다”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 신선한 충격을 주더니, 이번에는 국극 대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정년이’의 소리 감독이 됐다. 권씨는 우리의 전통 소리가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을 받는 요즘, 국악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도록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전통을 이끌어온 스승 세대와 각종 ‘컬래버’(타 장르와의 협연)를 통한 퓨전 국악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젊은 후배 세대, 그사이에 자리한 권씨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정년이’는 해방 이후 1950년대 활약을 펼쳤던 여성 국극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리꾼과 고수로 구성된 ‘판소리’를 기반으로 남녀 역할을 나눈 ‘창극’이 탄생했고, 박녹주 선생 등 여성 명창들이 모여 창극을 하는 여성 국극이 생겼다.
권씨는 극 중 최고 인기인 ‘매란 국극단’에서 진정한 소리꾼으로 거듭나는 천방지축 천재 소녀 정년이를 열연한 배우 김태리를 집중 지도했다. 촬영 현장 모니터링과 극중극 소리 일부를 구성 및 작창, 녹음 참여 등에도 권씨의 손길이 가닿았다.
“지난해에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어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국극의 역사를 많은 분들이 알게 되고, 전에 없이 소리가 주목을 받으며 더 뿌듯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 중 특히 압권은 정년이가 ‘떡목’이 되는 부분이다. 판소리에서 너무 목을 혹사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거나 상청(고음)이 나지 않는 것을 ‘목이 부러졌다’, ‘떡목이 됐다’ 등으로 표현하는데 극 중 파트너를 잃고 불안함과 경쟁심, 득음에 대한 욕망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으로 한계에 도전하던 정년이가 끝내 떡목이 되는 과정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태리씨와는 2021년 4월부터 연습을 시작해, 다 같이 소리의 고장 남원에 가 합숙 훈련을 하기도 하는 등 정말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떡목’을 그려내기 위한 과정이 기억에 남는데 쉰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촬영 전날 모여 4~5시간 계속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요.”
이 같은 과정은 배우에게도, 그녀의 소리 스승이던 권씨에게도, 시청자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었다. 권씨가 대중의 이목을 끌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는 “범 내려온다”로 잘 알려진 ‘이날치’의 원년 멤버로 2019년부터 2023년까지 활동하며 ‘K-국악’의 매력을 전 세계에 알린 이 중 한 명이다.
퓨전 국악, 판소리의 대중화 등 수식어를 자랑하지만, 그 배경엔 묵묵히 걸어 낸 전통 소리길이 있다. “어린 시절 ‘서편제’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그때 소리를 따라하는 성대모사를 하곤 했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제가 소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고, 마침 명창분이 멀지 않은 곳에 계셔서 그분을 스승님으로 삼아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정년이’와 같은 순간이 존재했다. 사춘기 시절 변성기가 찾아오며 목소리가 변하게 된 것이다. 인생에서 첫 번째 위기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렇게 꿈을 이어갈 수 있었다. 소리는 그녀의 인생에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소리꾼에게 있어 영원한 동반자인 ‘고수’를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권씨는 한 해가 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에서 느껴지는 깊이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판소리 마당을 묻자, 그녀는 ‘심청가’를 꼽았다.
“아이를 낳고 인물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이제는 ‘심청이’의 모친 곽씨 부인에 주목하게 됐는데, 소리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말이 인생의 경험이 얼마나 쌓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작품의 이야기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을수록 진짜 내 소리가 되는 기분입니다. 반면 예전에는 썩 좋아하지 않았던 ‘흥보가’가 요즘 들어 마음에 들어오게 되더라고요. 흥보 부인의 입장에서 서로가 정말 아끼고 좋아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며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깊어진 것인데, 이렇게 해마다 소리의 묘미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올 한 해 아티스트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 고루 균형을 이루며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면서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역시 소리꾼다웠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 판소리라는 음악 장르가 전통의 미학을 지키면서도 살아남는 길에 대해서도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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