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 300명 실태조사 결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주의’ 56% 10명 중 6명↑ ‘불안’ 정신건강 위태…국가차원 관리체계 전무… 대책 필요
병들어버린 남한의 봄 中. 몸보다 고통스러운 정신
“고향이 어디세요?”
‘지연’을 3대 인연 중 하나로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삶의 필연처럼 접하게 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어두운 상처 하나를 끌어오는 질문이 된다. 어린시절의 추억, 가족의 사랑이 묻어 있는 곳으로 데려가야 할 이 질문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상처를 자극해서다.
북한을 떠나 사선을 넘어 국내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들은 저마다 마음 속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경기알파팀이 만난 이들은 늘 숨죽여야 했고, 자신의 존재를 들키게 돼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공포에 떨며 살아간다고 했다. 트라우마는 국내에 머무는 기간에 상관없이 유지됐고, 신체 건강을 살필 틈도 없는 이들에게 정신 건강을 돌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같은 상황에도 국가 차원의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트라우마 치료 등 정신건강 관리 체계는 전무하다. 북한이탈주민의 정신 건강을 확인할 실태조사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물론 이로 인해 국내 정착에 미칠 영향 등을 분석할 후속 체계 역시 없는 상황이다.
18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정신건강에 대해 확인한 가장 최근 조사는 2018년 국립중앙의료원의 ‘북한이탈주민 인권피해 트라우마 실태조사’ 뿐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로 이뤄진 이 조사 이후에는 국가나 지자체 차원의 북한이탈주민 정신건강 조사는 없다. 특히 당시 이 조사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정신건강 상태가 위태롭다는 점이 확인됐음에도 후속 조치가 마련되지 않았다.
북한이탈주민 3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를 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체크리스트 총점을 기준으로 주의요망(33점 이상)은 168명(56.00%)에 달했다. 특히 60대 이상보다 미만이, 중국 거주 경험자가 남한으로 직행한 경우보다 모두 PTSD 지수가 높았다.
우울증 선별 도구(Patient Health Questionnaire·PHA-9)를 기준으로 볼 때 중등도 우울이 96명(32.00%)으로 가장 많았고, 고도우울 85명(28.33%), 경도 우울 57명(19.00%) 순으로 나타났다. 총점 4점 이하의 정상은 300명 중 단 62명(20.67%)에 그쳤다.
범불안장애 자가진단(GAD-7)을 통해 본 불안 지수 역시 경도에서 고도 불안을 보인 경우가 191명(63.67%)으로 10명 중 6명 이상이 불안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자살경향성 조사에서도 116명이 중간(46명·15.33%) 정도나 높은(70명·23.33%) 자살 위험성을 보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통합조사 조차 정신건강과 관련해서는 어떤 상황에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지 묻는 질문이 유일했다.
박승희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에서의 인권 유린, 탈북 과정에서의 트라우마, 남한에서의 차별 등으로 많은 상처를 입었다”며 “전쟁 상황을 겪은 사람들과 비슷한, 불안정한 심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탈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거쳤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정신건강 관리 체계는 꼭 필요하다”며 “차분하게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종합적인 이해가 선행된 후 특수성에 맞춘 정신건강 관리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커지는 불안·우울… 마음 기댈 곳 없는 탈북민
‘우울증. 무기력함. 대인 기피. 사회 부적응.’
한국에 온 지 5년차인 북한이탈주민 김지현씨(44·가명·여성)에게 따라 붙은 꼬리표다.
수원에서 매일 일터로 나가는 김씨. 그의 몸이 수원 곳곳을 익힌 것과 달리 그의 마음은 아직 국내에 적응하지 못했다.
2001년 브로커를 통해 중국으로 탈북했던 김씨는 2011년 한국으로 돌아온 뒤 모든 게 괜찮을 줄 알았다. 브로커에게 속아 팔려갔던 남편과의 결혼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낯선 환경 속에서 생계를 위해 일터에 던져져야 했던 아픔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도 남편에게 받아야 했던 구박도 이제는 모두 떨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는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유 모를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혼자 살기 위해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은 입 속에 음식을 넣을 때마다 그의 마음 속에 찾아 왔다. 어느 날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덮쳤다. 탈북하며 겪었던 이름 모를 낯선 남자의 성추행, 이 경험은 그에게 낯선 남자만 봐도 화들짝 놀라는 삶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정신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일을 하면 먹을 것을 살 수 있고, 누군가의 감시 없이 지낼 수 있는 환경에 왔음에도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걸 인정할 길이 없었다. 또한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북한에서의 삶은 그가 자신의 감정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다.
김씨가 점점 정신건강으로 육체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건 이 무렵이었다. 간신히 식당에 취업했지만, 일상적으로 물어오는 ‘어디에 사냐’, ‘고향은 어딘가’, ‘이름이 뭐냐’는 질문이 김씨를 옥죄어 온 것. 북한이탈주민이란 걸 알리면 당장이라도 경찰에 신고를 당할 것만 같았다. 결국 식당을 뛰쳐나온 그는 불안감과 우울감이 나날이 커지면서 어디에서도 일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한창을 일할 나이에 정부의 지원만을 목 빼고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됐다.
김씨는 “매일 매일 온전한 날이 없다”며 “이제는 아무런 정신적인 고통 없이 편안한 삶을 살고 싶지만,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내 얘기를 털어놓진 못하고 있다”고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 마음 아픈 탈북민을 위한 곳은 없다
탈북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 등으로 도내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신적 고통이 커지고 있지만, 이를 진단하고 치료할 전문 심리상담센터는 도내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현재 도내에는 전체 북한이탈주민 3만4천183명 중 32.8%에 달하는 1만1천241명이 살고 있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심리 상담 센터는 단 한곳도 없다.
통일부는 북한이탈주민의 정신건강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판단, 지난해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전문 심리 상담 센터인 마음소리공감 상담센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북한이탈주민이 가장 많은 경기도가 아닌 인천에 딱 한 곳 조성했을 뿐이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본인들의 정신 건강 문제를 나눌 곳이 필요하다고도, 이를 이용할 의향도 있다고 말한다.
올해 발표된 ‘북한이탈주민 심리상담지원을 위한 실태조사 : 심리사회적 적응과 상담이용경험 및 요구도를 중심으로(손영미 건양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이가경 건양대 상담심리학과 석사과정, 김민아·차유진·황예림 건양대 심리상담치료학과 학생, 원경희 코리아심리상담센터 대표)’ 연구서를 살펴보면 전문 심리상담센터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북한이탈주민 172명 중 67.5%(116명)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한 전문 심리상담센터를 이용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86.6%(149명)가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정부의 북한이탈주민 대상 심리 관련 지원은 입국 초기 국내 정착에 관한 것과 북한이탈주민 대비 턱없이 부족한 심리상담사 배치에 그친다.
하나원은 북한이탈주민이 한국에 입국하면 3개월 간 이들에 대한 개인 심리 상담,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찾도록 돕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국내에 정착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 뿐이다.
하나원을 나와 자립한 북한이탈주민은 지역별 하나센터에서 관리하는데, 이곳에는 전문 심리상담가가 배치돼 있다. 그러나 북한이탈주민 수와 비교하면 심리상담가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경기지역의 경우 6개 하나센터에 총 12명의 전문 심리상담가가 배치돼 있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이 1만1천241명인 것을 고려하면 상담가 한 명이 936명의 심리 상담을 담당해야 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들에 대한 심리 상담 역시 직접 찾아와 받아야 하는 만큼, 자신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게 위험 요인으로 작용한 경험이 있는 북한이탈주민에게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이순형 민주평통 과천시 협의회장은 “강도 차이는 있지만 북한이탈주민이라면 탈북 과정에서 누구나 트라우마, 우울감 등 심리적인 고통을 겪게 된다”며 “여기에 남한 적응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까지 함께 수반돼 전체적인 생활이 힘들어진다”고 했다. 이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을 발굴해 특수성을 고려한 상담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남북하나재단 관계자는 “북한이탈주민들의 경우 자신이 가진 정신질환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특성이 있다”며 “더 적극적으로 트라우마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을 조사하고 이들이 실질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 전문가 제언 “온전한 정착 때까지… 체계적인 심리 지원 필요”
전문가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리 잡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진정한 의미의 정착을 통해 국내 구성원으로서의 생산 인구가 될 수 있도록 이들에게 맞는 심리적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이들의 현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치유할 체계 마련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북한이탈주민이 가장 먼저 만나는 하나원에서부터 정신건강에 대한 관리가 시작돼 온전한 정착을 이룰 때까지 이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임 교수는 “북한이탈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전쟁으로 인한 단절로 인해 남과 북으로 나뉘었지만 한민족”이라며 “북한이탈주민은 이미 법률에서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된 우리 민족”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탈주민들은 자신의 힘듦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만큼 하나원에서부터 북한이탈주민의 정신건강을 위한 심리상담이 이뤄져야 한다”며 “지자체가 전문심리상담가와 북한이탈주민을 연계해 이들이 사회에 나온 후에도 정신건강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전문심리상담센터를 통해 이들을 관리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임 교수는 “북한이탈주민들만 가진 특성이 있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문심리상담센터가 없다”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문심리상담센터를 구축하고, 지역의 복지센터, 학교 내 위클래스 등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이 언제든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임 교수는 북한이탈주민이 자연스럽게 사회에 익숙해져 갈 수 있는 직업 훈련을 거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이탈주민은 탈북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많다. 우호적인 대우를 받아본적이 없어 자존감도 많이 떨어져 있다”며 “이들에게 무작정 취업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 소일거리를 제공해 사회에 적응하면서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생각할 수 있도록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북한이탈주민이 지역사회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그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는 데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역시 의견을 더했다.
이 교수는 “북한이탈주민은 자존감이 떨어진 탓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배제되다가 사회구성원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소외된다”며 “하나원에서 나오기 전에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만나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 등을 교육해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트라우마를 겪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발굴과 전문적인 도움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트라우마 센터를 지자체와 연결해 지역에 실제 트라우마를 가진 북한이탈주민을 발굴하고 이들이 전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전문 상담사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며 문화적 다양성을 가지고 편견에 대한 감수성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트라우마는 전문가의 도움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하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은 정보를 잘 몰라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며 “시스템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와 함께 비슷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모임 등을 통해 서로의 생각과 자원을 공유하는 것도 심리적인 고통을 덜어내는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제언했다.
최명민 백석대 사회복지학 교수 역시 북한이탈주민에 특화된 전문 심리 상담가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최 교수는 “일반 국민에게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문제와 북한이탈주민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는 전혀 다른데도 이들에게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전문가는 없다”며 “지역별 트라우마 센터 실무자들에게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교육을 별도로 진행해 전문적 역량을 키워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자체도 이런 센터들과 북한 이탈주민을 연계해 이들이 가진 트라우마를 분석하고 진단한 뒤 적극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북한이탈주민 관련 단체에 소속된 인력을 정신건강 전문가로 양성해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고 제언했다.
다만 최 교수는 이 같은 전문가 양성에 앞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을 발굴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탈북 과정에서 경험했던 트라우마를 가진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조사가 먼저 진행돼야 한다”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발견한 뒤 지역별 정신건강 센터를 통해 이들이 가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경기α팀
※ 경기α팀 : 경기알파팀은 그리스 문자의 처음을 나타내는 알파의 뜻처럼 최전방에서 이슈 속에 담긴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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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eonggi.com/article/202411265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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