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먹고사는 것조차 너무나 힘들었던 시절 그가 ‘북’을 만난 건. 일평생을 북 제작 장인으로, 가죽을 늘이고 팽팽하게 북통에 조이는 기술인 ‘북 메우기’에 헌신해 온 국가무형문화재 임선빈 악기장(78)은 365일 한결같이 북과 함께하는 아침을 연다.
왜 하필 ‘북’이었을까? 어린 시절 세상은 그에게 너무나 차가웠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다리, 가난, 뿔뿔이 흩어진 가족까지. 그는 “당시 학교는 커녕,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11살, 넝마주이로 구걸하며 오른쪽 청력까지 잃게 돼 절망으로 가득했던 그의 삶에 운명처럼 한 줄기 빛이 들었다. 굶주림 속에 시장을 방황하던 그의 맑은 눈빛을 알아본 ‘북 공예의 대가’ 황용옥 선생이 건넨 북 공장 견습생 제안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그날 밤, 처음 들은 북소리에 이끌려 시작된 북 만들기.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시작했지만, 마치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북소리의 울림에 매료된 그는 점차 북과 하나가 되어갔다.
끌과 망치로 나무와 가죽을 맞추고, 두드리고, 북소리를 완성해 가는 과정은 마치 그의 삶을 다시 조각해 나가는 일이었다. 사춘기를 겪을 새도 없이 남보다 일찍 철이 든 그에게 소박한 작업장은 삶의 전부가 됐다.
하지만 시련은 또 찾아왔다. 좁은 작업장에서 온종일 북 만들기에 몰두하던 그는 왼쪽 청력마저 약해져 결국 보청기에 의지해야 했다. 북 만들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청력에 결함이 생겼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북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 아픈 기억도, 웃었던 순간도, 모든 게 소리로 살아난다”며 북을 만들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소리에 온 마음을 담았다.
하나의 북을 완성하는 데 수개월의 정성과 노력을 들였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후 진동으로 소리를 느꼈듯이, 임선빈 악기장 역시 북소리를 가늠할 땐 오롯이 손끝의 감각과 마음으로 북의 울림에 집중했다.
나무와 가죽 상태 등 북을 이루는 요소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기에 혼신을 바쳐 북을 만드는 그는 24시간 일터를 떠나본 적이 없다. 북 제작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고 싶지 않은 열망과 열정이 넘쳤기에 일평생을 그렇게 작업장에서 먹고 자며, ‘가족’이 아닌 ‘가죽’과 함께해 왔다.
황용옥 선생에 이어 김종문 스승을 만나 기술을 연마해 온 그는 대구, 대전, 안산, 안양, 일산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북을 만들었고, 현재 시흥에 10년째 뿌리를 내리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대고 제작 참여, 2018년 평창 동계패럴림픽 대고 제작 및 기증, 그리고 2022년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인정까지, 그의 열정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북과 함께 해온 인생에 방점을 찍었다. 장애를 이겨낸 그의 노력과 북에 대한 사랑은 전통을 넘어 세상에 울림을 전했다. 그는 “나를 위로해 준 북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2020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울림의 탄생’으로 많은 이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사찰에서, 공연장에서,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의 북소리가 울렸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스펙트럼으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온 임 장인은 세밀하고 화려한 단청 문양과 힘찬 용머리를 북에 새긴 독창적인 작품으로 북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로서 그는 시흥에서 북 제작에 전념하고, 꾸준히 이어지는 전시회를 통해 전통을 알리며, 내년에 새롭게 착공될 ‘시흥문화원사’에 기증할 대북 작업에도 한창이다. 아울러, 그의 손끝에서 이어진 전통이 다음 세대에서도 울려 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제 그는 한 해를 보낼 때 치는 ‘제야의 종’처럼, 한 해를 맞이하면서 치는 ‘영신의 북’을 만드는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임 장인은 북소리가 들리는 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울림을 남기길, 그 울림이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고, 삶을 다시 일으키는 작은 기적이 되길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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