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손주가 질문을 던졌다. “고려인(한국인)인 나는 왜 카자흐스탄에 살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느냐”는 물음에 마음이 울렸다. 기억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리랑을 부르곤 했다. 그럴 때면 고국이 그립다며 종종 눈물을 훔치셨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다섯 해 전 황갈리나 평택고려인지원협의회(이하 협의회) 공동대표(66)가 한국행을 택한 이유다.
황 대표가 정착한 곳은 평택시 포승읍이다. 그는 포승읍 도곡 6·7·12리에 동구권과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 5천여명이 거주 중이며 이 가운데 3천500명 이상이 고려인이지만 아직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의사소통이다.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아 구직 활동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이 최초로 정착한 지역인 우슈토베에서도 가장 큰 학교인 ‘우슈토베 51번 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던 그도 정작 한국에서 처음 구한 일자리는 식당 청소였다.
그는 “한국어를 할 수 없으니 화가였던 사람도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근무 중인 데다 고려인 대부분 노동 시간이 길고 맞벌이인 경우가 많다”며 장시간 노동에 따른 자녀 교육과 돌봄에 공백이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오후 8~9시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아침 일찍 출근하기 위해 저녁식사 후 바로 자야 하는 상황”이라며 가정교육과 돌봄이 어렵다고 했다. 더욱이 러시아어 화자가 있는 돌봄 기관이나 학원이 없어 아이들은 하교 후 또래와 어울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교육자였던 그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2020년 포승에 학원을 차렸다. “고려인 아이들이 한국어를 배워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부모보다 더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미래를 일궈나갈 기회를 만들어줘야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12월9일 발족한 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은 것도 고려인이 겪는 이 같은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그는 평택안성흥사단, 평택외국인복지센터, 안중로타리클럽 등과 함께 협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단체와 힘을 모아 지원 조례 제정은 물론 고려인 커뮤니티 센터 설립, 고려인 마을 축제 개최 등을 추진하려 한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면서도 언어장벽을 넘기 쉽지 않았는데 지역 단체들로부터 협의체를 만들자는 제의를 받아 굉장히 기뻤다”며 “이런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란 사실과 함께 한국인과 고려인은 차이가 없다고 지역으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생각이 많지만 아이들을 위한 공간과 젊은 사람들이 한국 전통문화를 배우거나 노인 대상 의료 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커뮤니티 센터를 우선 설립하고 싶다”며 “우리를 반기는 다른 나라는 없다. 앞으로 고려인들이 한국에서 정착해 잘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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