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했다. 압제(壓制)가 한반도를 덮쳤다. 설도 없앴다. 양력으로 설을 쇠라고 강요했다. 음력은 비과학적이라는 궤변도 동원됐다. 일제가 그랬다.
이후 마지못해 양력으로 설을 쇠긴 했지만 음력 설 쇠기를 결코 포기하진 않았다. 그러자 설을 두 번 쇠는 ‘이중과세’( 二重過歲)는 비효율적이라고 윽박질했다. 음력으로 설 쇠는 건 비합리적이고 양력으로 설 쇠는 건 합리적이라는 음모론도 펼쳤다. 일제의 포악한 통치였다.
그때 한 청년이 아이들에게 일제의 허위를 제대로 알려야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들려줄 동요의 노랫말을 썼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윤극영 선생(1903~1988)의 동요 ‘설날’은 그렇게 탄생했다. 20세기 버전의 ‘서동요(薯童謠)’였다. 1924년이었다. 그 노랫말의 메시지는 양력으로 설 쇠기 거부였다. 조용하면서도 꾸준했던 풍유(諷諭)였고 저항이었다.
이 대목에서 합리적인 의문이 든다. 윤극영 선생은 왜 까치의 설날을 어저께라고 했을까. 고 서정범 교수는 작다는 뜻의 ‘아치’가 접두사로 붙여졌다가 음(音)이 ‘까치’로 바뀌었다고 주장했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에피소드도 설득력이 있다. 신라 소지왕 때 일이었다. 왕후가 한 스님과 모의해 왕을 없애려고 했다. 이때 까치와 쥐, 돼지와 용 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소지왕은 이후 동물들의 공을 인정해 십이지신(十二支神)에 모두 넣어줬다. 하지만 까치를 넣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설 바로 전날을 까치의 날로 정해 까치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음력설이 부활한 건 60여년이 지난 1985년이었다. 하지만 명칭은 ‘민속의 날’이었다. 그러다 1989년 ‘설’이란 이름이 복권됐다. 광복 이후에도 음력은 비과학적이라는 논리가 한동안 식자층에서 득세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