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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자! 미래유산] ⑥이천 ‘공동우물’, 주민 이야기가 샘솟던 동네 방송국
문화 지키자! 미래유산

[지키자! 미래유산] ⑥이천 ‘공동우물’, 주민 이야기가 샘솟던 동네 방송국

▲ 몇 해 전까지 청소와 고사를 지냈던 이천시 설성면 행죽2리 공동우물과 빨래터.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

편집자주

 

어느 노인이 집 근처에 물이 잘 나오는 우물이 있어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되자 길손이 들끓었다. 이를 귀찮게 여긴 노인이 동냥 온 스님에게 길손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우물을 메우라고 했다. 노인이 그대로 했더니 살림도 망해버렸다.”

이천시에서 내려오는 전래동화 이상한 우물의 내용이다. 우물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를 교훈 삼듯 주민들은 지금도 마을의 공동우물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특히 설성면에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관리하며 고사까지 지냈던 공동우물 두 개가 있다. 예부터 없어서는 안 될 생명수이자 빨래터로, 그리고 소통과 만남의 장소로 마을 주민의 삶에 녹아든 오래된 생활유산 공동우물을 들여다보며 <지키자! 미래유산> 여섯 번째 여정을 시작한다.

 

장천3찬샘물


 

유배된 사헌부 장령 유승조가 이용한 우물

▲ 설성면 장천3리 마을 입구 큰 길가에는 보호수 향나무 아래 500년이 넘는 우물 '찬샘물'이 있다. 

눈이 내리고 한파특보가 발효된 지난 19, 한천(우리말 지명 찬샘골)으로 불리던 장천3리를 찾았다. 마을에 도착하니 입구 길가에 보호수로 지정된 커다란 향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올해 수령 330년 된 이 나무 바로 아래는 마을의 옛 이름을 딴 우물 찬샘물이 있다.

찬샘물은 폭·길이 모두 약 1.6m, 깊이 3m인 방형평면 형태의 석조우물이다. 슬레이트 지붕이 덮여있고 주변에 칸막이를 둘러서 정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다.

▲ (왼쪽)영하의 날씨에도 얼지 않아 진녹색 물이끼가 가득한 우물 안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오른쪽)장천3리 주민 강병예씨가 지난해 우물을 청소해서 깨끗한 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우물은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물이라고 알려졌다. 이를 증명하듯 영하의 날씨에 주변 저수지가 꽁꽁 얼어붙은 순간에도 우물물은 얼지 않았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진녹색 물이끼가 가득하다. 해마다 물을 퍼내고 청소한다고 하더니 한참 된 모양이다.

우물 뒤편 골목에 사는 강병예(88)씨는 저래 봬도 깨끗한 물이여. 스물세 살에 여기로 시집와서 여태 쓰고 있어. 다른 집은 상수도 쓰지만 난 우물물이 좋더라고. 작년인가 우리 아들이 마을 남자들이랑 기름 사다가 양수기로 진일 퍼내고 약 넣고 청소했어. 바위 속에서 나오는 물이 워낙 많아서 물이끼도 엄청 껴. 날이 풀려야 또 청소하지.”라며 현재도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 우물가에 있는 유적비 앞면에는 연산군 때 유배온 유승조가 이용했다는 찬샘물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유승조의 약력이 적혀있다.  

찬샘물 곁에는 우물의 역사를 기록한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유적비를 살펴보면 연산군 때 이곳으로 유배되었던 유승조가 이용한 우물임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90년 전 연산 10년 갑자(1504) 연산군의 음란한 정치는 백성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이 포악한 정치에 항거한 선비가 있었으니 사헌부 장령 유승조였다. 그의 맵고 매서운 상소는 연산군의 미움을 사 두 번이나 이곳 찬샘골로 유배되었다. 불의는 망하고 정의에 횃불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중종이 등극하니 사면되어 중용되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칠서를 언해하여 후학을 훈육하고 성리학을 후세에 남기었도다. 이 나무와 우물은 유배 당시 충의와 청아함을 자랑함이다. 이 우물은 사방 5m의 넓은 암반에서 솟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식수로 사용되어오다, 1935년 현재의 모습으로 부락민이 축조하였고 암반이 깊게 파여진 것은 1950625일 사변시 장천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삼천여 명의 피난민의 두레박에 의해 파였으며, 이 물은 차고 맑아 약수로도 널리 알려졌고 그래서 부락의 지명도 한천곡으로 불리고 있으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옛날부터 우물의 치성제를 매년 정월초에 부락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518년이나 된 우물이다. 유승조의 후손들이 최근까지도 이곳에 살았으며, 찬샘물을 신성하게 여겨 매년 음력 정월에 우물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사 때 청소하면 아들 낳고, 재앙이 생기면 물이 넘친다

▲ 오른쪽 측면에서 본 우물의 모습(위)과 맞은편 물이 흘러내려 가도록 설치된 하수구.

이천문화원에서 1997년 발간한 <이천시 설성면 문화유적 민속조사 보고서>에는 우물고사와 얽힌 재미있는 속설도 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샘을 말끔히 퍼내어 청소하는데, 이때 샘 청소를 하고 물을 마신 이는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청소하려는 아낙네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용덕 장천3리 이장은 이 동네 사람들이 아들이 많았어. 딸은 별로 없었고. 10년 전에는 50가구 살았는데, 다들 우물물을 신성하게 여기고 먹어서 전부 아들만 낳았다는 얘기가 나왔지라고 전했다.

마을에 재앙이 있을 때는 물이 넘쳤다는 전설도 있다. 설성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발간한 <설성 옛이야기> 책에는 마을에 큰 위험이 닥쳤던 임진왜란 때와, 6.25전쟁 때 물이 넘쳤다고 쓰여있다.

장천3리 주민들에게 성스러운 장소였던 찬샘물. 신성함을 믿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우물의 신빙성이 더해지는 듯하다.

 

 

행죽2대동우물


 

동네 소문 넘치던 공동 빨래터의 추억

▲ 행죽2리 설성초등학교 앞 논에는 빗물이 침투하지 않도록 파란 지붕을 씌워 놓은 100년 넘은 '대동우물'이 있다.

발걸음을 옮겨 행죽2리로 향했다. 이 마을에도 여전히 물이 솟아나 동네 자랑거리인 대동우물이 있다. 설성초등학교 바로 앞 논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자처럼 파란 지붕을 씌워 놓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고, 우물가에는 수령 200년이 넘는 향나무가 있다. 향나무가 우물의 수호나무라면 은행나무는 수문장인 셈이다.

대동우물은 원형 형태의 석조우물이다. 겉으로 드러난 우물 높이는 60cm, 지름은 160cm 가량 된다. 깊이는 4m.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모내기를 할 때쯤 물을 퍼내고 청소를 했다고 하니 꽤 깊은 탓에 힘들었을듯하다.

▲ (위)우물 안은 새까맣게 보이지만 바가지로 물을 떠보면 깨끗하다. (아래)우물가에 세워진 '수신기념비' 표석.  

이 우물도 장천3리 찬샘물처럼 여름은 차고 겨울엔 따뜻해 얼지 않는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이끼가 심하게 껴 물이 새까맣게 보였다. 청소 안 한 지 오래라는 의미다. 물 위에는 헌 바가지가 놓여있고 바닥에는 철수세미가 떨어져 있다. 최근에도 어떤 아낙이 설거지를 하고 간 모양이다. 바가지로 물을 떠보니 우물 색과는 다르게 깨끗하다.

우물가엔 수신기념비(水神紀念碑)라 새겨진 표석이 있다. 높이 72cm, 18.5cm, 두께 11.5cm의 작은 비석이다. 대정 88월이라 적힌 연대가 또렷이 보인다. 1919년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그해 여름 세워진 것이다.

▲ 1. 공동빨래터가 함께 있는 대동우물 전경. 2. 원형의 석조우물과 연결된 수로. 3. 사각 웅덩이와 빨래판 형태의 콘크리트 빨래터. 

대동우물의 독특한 점은 빨래터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우물에서 흘러내린 물로 빨래를 할 수 있도록 원형의 석조우물에 수로를 연결해 사각 웅덩이를 만들어놨다. 가운데가 약간 휜 빨래판 형태의 콘크리트 발판을 4개 가로질러 놓아 빨래하기 좋게 해놓았다. 우물에서 넘쳐 나와 빨래터를 거친 물은 논으로 그대로 흘러드는 구조다.

이 빨래터는 마을 아낙네들에게 이야기가 샘솟던 동네 방송국이기도 했다. 마을 언저리에 사는 남언년(82)씨는 저 우물에선 물이 항상 넘쳤어. 옛날에 50~60 집이 살았는데 죄다 여기로 와서 물 길어가고 빨래했어. 모여서 빨래하다 보면 동네 소문 다 알고, 누구 집에 무슨 일 났는지 속속들이 들을 수 있었지. 방송국이나 다름없지 뭐. 그때가 재미있었어. 그리워라고 회상했다. 지금도 큰 이불 빨래는 이곳에 와서 하는 아낙이 있다고 한다.

매일 물지게 지고 오는 이들로 우물가가 복작이고, 빨래터에선 아낙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빨래 방망이를 휘두르는 풍경이 절로 연상된다.

 

흉사 징조로 붉게 물들고, 꽃이 피었던 신성한 우물

▲ 행죽2리 주민 남언년씨가 대동우물을 가리키며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동우물 역시 예부터 고사를 지내왔다. <이천시 설성면 문화유적 민속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해마다 정월이 되면 우물 앞에 제상처럼 시루떡과 소머리를 차려놓고, 나이 많으신 분이 축문을 쓰고 제복을 갖춰 입은 다음 제사를 지냈다.

제사 후에는 대동 사물놀이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대동우물을 중심으로 제관을 따라 돌면서 사물패와 함께 뚫어라 뚫어라 샘구멍 뚫어라, 솟아라 솟아라 펑펑 솟아라라고 외쳤다.

제사를 지낸 덕인지 이 우물의 물은 가뭄 때도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 마을에 흉사가 생길 징조로 물이 뒤집히고 붉게 물든 경우가 있어서 주민들은 각별히 신성시한다.

우물에 얽힌 전설이 있냐고 묻자 남 씨는 왜정 때인가. 우물 안에서 꽃이 두 송이가 피었데. 무슨 꽃인지는 몰라. 동네서는 그 꽃을 꺾어가면 부자 된다는 소문이 나고 외지에서도 구경을 왔데. 한데 웬 과부가 소문 듣고 꽃을 잘라갔다 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죽었다 들었는데 욕심내다 화 당한 거지라고 말했다.

 

관정 등 보존 위기...역사유적으로 남겨야

▲ 행죽2리 입구 도로변에서 건너다본 마을과 우물.

행죽2리로 들어서는 입구 도로변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한적한 시골 마을 가운데 있는 공동우물과 빨래터가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그림 같다. 물 길어 다니고, 손 빨래를 하느라 고단했지만 정겨웠던 시절, 그 추억의 한 장면으로 버려두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주민들도 지역의 옛 생활풍습과 정체성을 담고 있는 우물을 앞으로도 잘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여러 문제가 생겨 불만이 생기고 있다.

정광교 행죽2리 이장은 몇 년 전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우물 바로 옆에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관정을 파 놨어. 여름에 모내기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잖아. 논에 댈 물을 늘린다고 수맥을 딱 찔러서 우물물이 바닥까지 내려가. 지하수 자체도 오염됐어. 우물물도 다 오염됐으니 못 먹지. 관정을 폐쇄하든지 조치가 필요해라고 토로했다.

이어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야. 동네에 2만여 평 정도 물류창고가 들어오는데 설 지나면 공사하려고 흙을 다 파낸다고 하더라고. 한데 우물이 있는 논이 있잖아. 서울 사는 논 주인이 공사장 흙으로 논을 메꾸겠다고 연락 온 거야. 그래서 내가 우물 부지 100평만이라도 팔라고 했는데 안 판다더라고. 보존하기 힘들어졌어. 마을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편이야. 자체 능력으로는 힘들어. 땅이 문제야라고 하소연했다.

▲ 마을회관에서 대동우물이 처한 문제점에 대해 토로한 정광교 행죽2리 이장.

우물 꼴이 말이 아니게 된 게 안타깝다. 주민들은 이천시를 비롯해 학계 및 전문가 등 많은 곳에서 관심을 갖고 보존 방안을 마련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박진호 인하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우물은 마을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주민 문화의 태동을 일으키는 중요한 유산인데, 방치하지 않고 오랜 세월 유지하며 고사를 지냈던 점, 특히 비석까지 존재하는 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이어 "인천 연수구에 있는 백제시대의 우물 비류정이 역사유적된 것처럼 이천의 두 우물도 역사유적으로 남기는 게 가능해 보인다고 제언했다.

유명 위인들의 유적지나 사찰만이 문화유산이 아니다. 그 옛날 민중들이 먹고살기 위해 치열하게 개간하며 일구어 온 흔적도 소중한 우리 유산이다. 우물을 지금까지 사용하며 보존하고자 하는 주민의 의지를 보며, 새삼 우리 생활 속에 밀착해 온 소중한 생활유산에 대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진=황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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