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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원폭피해자의 악몽] 1세대 ‘日 징용루트’ 따라간 후손
정치 끝나지 않은 원폭피해자의 악몽

[끝나지 않은 원폭피해자의 악몽] 1세대 ‘日 징용루트’ 따라간 후손

아버지 日 끌려간 길 따라...일흔살 아들도 섧게 울었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의 피해를 당한 원폭피해 1세대의 발자취를 따라 부산역으로 향하는 열차 탑승장소인 평택역을 찾은 원폭피해 2세대들이 철로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윤원규기자
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나선 원폭피해자 2세대 (왼쪽부터) 황창영(72)ㆍ박재훈(76)ㆍ박상복(76) 씨가 강제징용 집결지였던 평택시 성동초등학교를 찾아 당시의 사진과 자료 등을 살펴보고 있다. 윤원규기자

“부인, 내 기필코 살아 돌아오리라. 그때까지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잘 부탁하오….”

1944년 8월, 평택군 대안리. 이곳에서 부모님과 부인,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며 농사를 짓던 황종호씨(1922~2021년)는 일본으로 강제징용되는 자신을 보며 오열하던 부인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살아 돌아오겠다”는 기약없는 약속만을 남긴 채 ‘사지(死地)의 땅’ 일본으로 떠났다.

아시아, 태평양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하던 일본 정부는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9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식민지로 강점하고 있던 조선의 청년들을 강제 징용했다. 특히 일본은 당시 경기도 평택군, 안성군, 경성(지금의 서울) 등에 거주하는 1923년생(당시 만 21세) 전후의 청년에게 징용영장을 발부, 미쓰비시 징용공으로 강제 동원했다.

징용영장은 황종호씨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부인과 부모님,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 등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5천평의 농지를 경작하던 황씨에게 ‘1944년 9월 일본으로 출두하라’는 징용영장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당시 마을 구장(현 이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에 나섰던 황씨의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인 아들의 징용을 막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강제징용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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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의 피해를 당한 원폭피해 1세대의 발자취를 따라 강제징용 1차 집결지인 평택 성동초를 찾은 원폭피해 2세대들이 아버지가 집결했던 운동장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윤원규기자 

결국 그렇게 황씨는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한 채 집결지인 평택 성동보통소학교(현 성동초)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평택, 수원, 서울 등지에서 모인 100여명은 미쓰비시 마크가 박힌 모자를 눌러쓴 일본인의 통제 속 훈시를 들은 후 평택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평택역. 황씨를 비롯한 징용공들 앞에는 사람이 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화물열차가 서 있었다. 이들은 일본 관리인의 욕설과 고함 속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짐짝처럼 화차에 쑤셔넣어 진 채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징용공 중에는 태어난 지 7개월 된 아들을 남겨두고 징용된 사람, 배가 부른 만삭의 아내를 두고 끌려온 사람도 있어 열차 안은 금세 울음바다가 됐다.

황씨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미쓰비시 히로시마조선소로 이동했고 이후 이곳에서 일주일간 군사훈련을 받은 후 주철공장에서 노역했다. 당시 황씨 등 징용공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매일 40t 정도의 철을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 녹이는 중노동을 반복해야 했다. 의식주 역시 몹시 열악했는데 숙소는 다다미 8장짜리 비좁은 방에 8명이 모여 지내야 했고, 식사는 조가 섞인 형편 없는 것으로 늘상 배를 곯아야 했다. 변변한 속옷도 없던 탓에 비료 포대에서 실을 뽑아 직접 바느질을 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이 같은 강제노역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으로 급변했다. 당시 ‘원폭 폭풍’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던 황씨는 고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 속 밀항선에 오르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꿈에 그리던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의 피해를 당한 원폭피해 1세대의 발자취를 따라 부산역으로 향하는 열차 탑승장소인 평택역을 찾은 원폭피해 2세대들이 철로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윤원규기자
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의 피해를 당한 원폭피해 1세대의 발자취를 따라 부산역으로 향하는 열차 탑승장소인 평택역을 찾은 원폭피해 2세대들이 철로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윤원규기자 

■日 징용되던 절망의 그 길…77년 후 다시 찾은 후손들

“77년 전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던 아버지의 한 맺힌 절규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2021년 6월, 평택 성동초등학교. 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의 피해를 당한 원폭피해자의 후손인 황창영(72ㆍ아버지 황종호씨), 박상복(76ㆍ아버지 박남순씨), 박재훈씨(76ㆍ아버지 박창환씨)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던 아버지의 고뇌를 되뇌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21일 경기ON팀은 일본에 강제 징용된 1세대의 아픔을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마련하고자 일본 강제징용 원폭피해자 2세대와 함께 강제징용 집결지였던 평택 성동초(당시 성동보통소학교)를 찾았다.

이날 찾은 평택 성동초는 77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만큼 이전 목조건물 학교는 사라지고 신축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100년 기념관’에는 1940~50년대 당시 학교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시 학교의 사진을 살펴본 황창영씨는 강제징용 탓에 학교로 끌려온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일본에 가면 노예처럼 일하다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죽겠다고 생각했음에도, 어머니에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생존 의지를 다진 아버지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 탓이다. 황씨는 “학교 운동장에 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놓인 100여명의 조선 청년들이 두려운 눈빛을 교환하며 떨고 있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눈망울에 맺힌 이슬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듯한 표정의 박상복씨 역시 비참했을 징용 과정을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심경을 떠올리며 착잡함을 토로했다. 박씨는 “아버지는 자식들이 고통받을 것을 우려해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징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당시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혼자만의 아픔으로 간직, 평생 고통받으며 살았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눈물만 난다”고 했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의 피해를 당한 원폭피해 1세대의 발자취를 따라 부산역으로 향하는 열차 탑승장소인 평택역을 찾은 원폭피해 2세대들이 부산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보고 있다. 윤원규기자
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의 피해를 당한 원폭피해 1세대의 발자취를 따라 부산역으로 향하는 열차 탑승장소인 평택역을 찾은 원폭피해 2세대들이 부산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보고 있다. 윤원규기자

경기ON팀과 원폭피해자 후손들은 성동초에서 평택역으로 이동했다. 1944년 당시 수도권에 살다 강제징용된 징용공들은 성동초에 집결한 뒤 평택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 부산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이날 원폭피해자 후손들은 성동초에서 평택역으로 이동하며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구겨지는 비참함 속에서도 “반드시 살아 돌아가자”는 결의를 다졌을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재훈씨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마을 주민에게 몰래 한글을 가르치며 독립을 염원한 아버지의 성정 상, 징용 열차 안에서도 모두에게 ‘꼭 살아 돌아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을 것”이라면서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삶의 의지를 다진 강제징용 원폭피해자를 현 세대도 반드시 기억해 다시는 우리나라 역사에 이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경기ON팀 = 이호준ㆍ최현호ㆍ김승수ㆍ채태병ㆍ이광희ㆍ윤원규기자

※ '경기ON팀'은 어두운 곳을 밝혀(Turn on) 세상에 온기(溫氣)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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