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강바람을 쐬며 여유롭게 찾으리라. 양수역 근처 자전거포도 미리 확인해 두었던 터라 떨어지는 빗방울이 야속하다. 자전거 대신 택시를 타고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에 자리 잡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 도착한다. 우산을 쓰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만난 보리밭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요즘은 고향에서도 이런 풍경을 볼 수가 없다.
황순원(1915~2000)의 소설 ‘소나기’의 무대를 재현한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촌장 김종회)은 지난 13일에 개관 12주년을 맞았다. 소나기마을이 만들어진 사연은 다시 들어도 흥미롭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 등장하는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는 단 한 줄의 문장을 근거로 양평군과 황순원이 재직했던 경희대가 2003년부터 소나기마을 사업을 추진해 2009년 문을 연 것이다. 개관 이후 소나기마을이 거둔 성과는 더욱 놀랍다. 전국에 있는 100여개의 문학관 중에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덕에 자리 잡은 문학관 건물은 수숫대 움집 형상이다. ‘황순원문학관’이라 새긴 벽면의 보랏빛 장식이 초가을의 해바라기를 연상시킨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글 자음과 모음을 꽃술처럼 채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문학 속에 깃든 두 개의 별
최형숙 운영팀장의 안내를 받아 문학관부터 둘러본다.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같은 책들을 들여다본다. 60여년이 지났지만 표지디자인이 산뜻하다. “표지를 서양화가 김환기가 그렸다고 해요.” 수필가이기도 한 윤난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시관 안쪽에 마련된 작가의 집필실 앞에서 오래 머무른다. 작가의 일상과 정신세계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왼편 벽에는 작가가 쓰던 모자와 두루마기, 바바리코트는 물론 아내의 분홍색 치마저고리도 걸려 있다. 가운데 펼쳐진 한글 병풍은 황순원의 작품 제목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중앙을 차지한 원목 책상이다. “가난하진 않았지만 매우 검소했다고 해요. 황순원 선생이 다리가 부러진 책상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제자들이 구해준 책상이랍니다.” 모퉁이를 돌자 얼핏 보면 낙서장 같은 낡은 노트가 펼쳐져 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깁고 지우고 고친 흔적이 가득한 창작노트다. 대가도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작품을 빚어내는 것이다!
황순원에게 아버지 황찬영은 ‘별’이었다. 평양에서 교사로 일했던 황찬영은 3ㆍ1만세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살이한 독립지사였다. 부친은 1929년 열다섯 살이 된 아들을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시켰다. 오산중학교는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한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사학으로 김소월, 백석, 함석헌 같은 문인과 사상가를 길러냈다. 한 학기만 다니고 건강 때문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했지만 오산학교는 소년 황순원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때 만난 남강 이승훈 선생을 보고 소년은 감탄한다. “남자도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황순원은 성장한 후에도 늙을수록 아름다운 한 사람의 남자를 발견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온 부친 황찬영이다. ‘마음의 두 별, 남강 이승훈과 부친 황찬영’을 소개하던 윤 해설사가 황순원의 시 ‘아버지’를 들려준다. 황순원이 평생 견지한 자세는 바로 아버지에게서 내림 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황순원은 단편소설 104편과 시 104편을 남겼다. 황순원은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작가의 고집은 작품을 구상하고 취재하는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같은 대학에 재직하며 친하게 지내던 서정범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작품 속에서 길이 어디로 난 것인지 단 한 줄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하루를 허비한 적이 있었다고 해요.”
다시 계단을 올라 시시각각 조명이 바뀌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중앙홀을 굽어본다. “빛깔이 참 예쁘다!” 문학관 해설을 듣다가 인사를 나누고 동행하게 된 중년의 두 여성이 감탄한다.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들과 ‘수숫단 강당’에서 열리는 ‘문인의 엽서전’을 둘러본다. 문학평론가 김종회 촌장과 시인 신달자, 소설가 윤대녕을 비롯한 31명의 저명한 문인들이 코로나19로 지치고 상한 관람객들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마련한 이 기획전은 8월 말까지 열린다. 엽서전이 열리는 3층에는 쉼터가 두 개나 있다. 두 사람을 따라 ‘쪽빛구름 쉼터’부터 들러본다. 이 예쁜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보였다.” 물론 ‘소나기’의 한 구절이다. 이름처럼 공간 구성이 아기자기한 ‘갈밭머리 쉼터’에서 녹음이 짙은 소나기마을의 싱그런 풍경을 담는다.
■첨단의 설비와 콘텐츠로 순수와 서정의 동심을 유혹하는 소나기마을
마당에 나선다. 그새 비가 그쳤다. 마당가에 속이 빈 여러 개의 수숫단 움집이 서 있다. 맑은 날에는 인공 소나기를 내리게 한다니, 소년과 소녀처럼 수숫단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할 수 있겠다. 산책길로 들어선다. 땅이 젖었지만 길이 잘 관리되어 산책하는데 별문제가 없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소설 ‘소나기’의 배경을 떠올리게 누렁소와 붉은 송아지 조각, 징검다리, 섶다리 개울, 수숫단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소나기마을은 공사가 한창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2020년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사업’ 공모에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의 ‘인터랙티브 소나기 산책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 사업’(10억원)이 선정되고 올해 다시 ‘스마트 박물관 구축사업(2억원)에 선정된 것이다. “첨단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콘텐츠 개발을 통해 관람객에게 색다른 문화체험을 제공할 것이다. 문학촌은 10억원의 사업비로 실감콘텐츠를 제작하고 체험프로그램과 스마트 박물관 구축 사업을 실행한다. 앞으로 ‘소나기’를 8가지 테마로 나누어 관람객이 이동하며 소설 ‘소나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가상현실세계를 체험하고, 앱을 매개로 한 체험프로그램도 진행하게 된다.” AI로봇, VR, 인터랙티브 미디어 등의 첨단 디지털 기술로 ‘소나기’의 감성과 정서를 관람객들에게 전달할 것이니 김 촌장의 말처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소나기마을은 연평균 10만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국내 최고 수준의 문학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53년에 발표한 단편 ‘소나기’가 7080세대는 물론 첨단기기에 익숙한 청소년들의 마음까지 빼앗는 매력이 궁금하다. 김 촌장은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황순원과 소나기라는 이름이 갖는 힘이고, 둘째는 문학관의 위치 즉 근접성이며, 셋째는 우리 문학관만의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일 것이다.”
문학관 바로 옆에 자리한 황순원 선생 부부의 묘를 찾아 묘비명을 읽어본다. ‘20세기 격동기의 한국문학에 순수와 절제의 극의 이룬 작가 황순원, 일생을 아름답게 내조한 부인 양정길 여사 여기 소나기마을에 함께 잠들다.’ 국민작가로 불리는 황순원은 제자복도 많았다. 전상국, 조세희, 조해일, 한수산,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의 소설가와 이성부, 조태일, 정호승, 하재봉, 박주택, 류시화, 이산하 등의 시인, 그리고 신봉승, 김정수 같은 극작가도 그의 제자다. 물론 아들 황동규 시인도 제자에 포함할 수 있겠다. 김종회 촌장은 어느 인터뷰에서 황순원의 ‘소나기’ 주제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차마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도 조심스러운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심정적 교감이지요.”
맑은 날 자전거를 타고 강바람을 쐬며 다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찾고 싶다. 가까운 곳에 있는 잔아문학박물관도 둘러봐야겠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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