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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1. 유관순과 서대문감옥 여성들
문화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1. 유관순과 서대문감옥 여성들

‘독립의 魂’은 가두지 못했다

3ㆍ1운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아이콘’ 유관순이다.

사회적인 민주화 진전과 더불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이 본격화하면서 기존 독립운동가를 바라보는 인식은 유관순 외에도 점차 폭넓게 변화하고 있다.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에서 오랫동안 잊혀진 여성들에 대한 올바른 자리 매김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암울한 현실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의연한 활약상은 신선한 자극제로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과거 서울 평양 정주 원산 등지에서 울려진 3ㆍ1만세운동 소식은 철도 연선을 따라 전국 각지로 삽시간에 파급됐다. 만세 현장에 참여한 학생들이나 고종 인산일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인사들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지역사회에 알려는 전령사였다. 파주는 서울과 개성의 중간에 위치해 이러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파주 출신 구세군 신자 임명애는 지역 내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파주 유관순’으로 일컬어졌다. 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서 어윤희 권애라 유관순 등 8인과 더불어 옥중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 “구세군 바탕으로 열정적 활동”… 지역사회 신망 두터워

파주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임명애ㆍ염규호 부부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해 인생 역정을 밝히는데 한계를 지닌다. 지금까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먼저 임명애 부교는 1886년 3월25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578번지에서 출생했다. 남편 염규호는 1880년 3월23일 같은 주소로 기록돼 있다. 이는 판결문에 근거한 것으로 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반영한 주소로 판단된다. 손자 증언에 의하면 염규호 정교는 숯 공장을 운영한 사업가였다고 한다. 이들이 언제 결혼을 했고 구세군에 입교했는지 등은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은 구세군 파주영문 신도로 생각된다.

한 자료에 의하면 “문산포역에서 한 정거장을 지나 금촌이라 하는 정거장으로부터 7리 정도 떨어진 곳에 ‘교하리’라는 구읍이 있다. 해처에 거성하는 염규호와 해씨의 부인은 구세군을 심히 사랑해 구세군영을 설립하기를 심히 원하는지라” 등 문구가 쓰여 있다. 열성적인 활동과 깊은 신앙심 등이 지역사회에서 상당한 신망을 받았던 인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종교 활동을 통해 주민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줌으로써 3ㆍ1운동 주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파주, 독립만세 소리로 요동치다

러일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려던 일본은 경의선 부설에 박차를 가했다. 철도 부설권을 장악한 일본은 파주군ㆍ교하군ㆍ고양군 등지에 강제로 역부를 징발했다. 주민들은 이에 반발해 저항하는 등 일제 침략에 정면으로 맞섰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마을을 다니며 강제적인 징발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의병전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강제병합 이후에는 토지조사사업과 더불어 특산물인 농산물 중 ‘콩’을 수탈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만큼 항일의식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19년 3월10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인근에 사는 가정부 임명애(林明愛)다. 그녀가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호응함으로써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행렬은 운동장을 돌면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주민들에게 알렸다. 임명애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구세군에서 운영한 주일학교와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평화적인 시위는 바야흐로 파주지역 독립만세 운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소식은 관내로 파급되는 가운데 주민들 사이에도 조국독립을 위한 항일의식이 점차 확산을 거듭했다.

평화적인 시위가 있은 후 파주지역은 보름 동안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로 소강상태였다. 각지에서 전개된 소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곳에 전해지고 있었다. 주민들을 동원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위한 ‘준비단계’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3월25일경(실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학생 김수덕(당시 16세)과 농민 김선명(24세) 등은 그녀 집을 찾아와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니 방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남편 염규호와 함께 이들과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격문 인쇄ㆍ배포가 필수적이라고 의견을 교환하는 동시에 결정했다.

태극기 손에 쥐고… 들끓는 시위행렬

곧바로 염규호는 격문의 원고를 작성했다. “오는 28일 마을주민 일동은 모두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만약에 불응하면 방화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세시위에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강력한 ‘행동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수덕은 등사판을 빌려와 60여매를 등사했고, 김창실은 와석면 구당리ㆍ당하리 등지에 배부했다. 그런데 일제 경찰과 헌병의 감시는 점점 삼엄하게 다가왔다.

만세시위는 격문에 있는 바와 달리 이틀 앞당겨 26일에 전개했다. 이들 부부를 비롯한 주동자는 700여명의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며 교하면 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를 도착한 시위대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면서기 2명에게 업무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를 목격한 주민들이 시위행렬에 가담해 1천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향해 나아가자 기세에 눌린 헌병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파주헌병 분소에 병력을 요청했다. 지원병력에 용기를 얻은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고 당하리 최홍주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했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사진=구세군역사자료관ㆍ서대문형무소역사자료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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