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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2-1. ‘제시의 일기’에서 독립의 염원 담은 최선화·양우조
문화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2-1. ‘제시의 일기’에서 독립의 염원 담은 최선화·양우조

모교 이화여대에 재직 여성권익 옹호 앞장...독립운동가 양우조와 결혼, 임시정부 도와
애국부인회 재건운동 착수 서무부장 활동, 국내외 여성들 각성 촉구 계몽·교육 온힘

최선화•양우조 부부의 결혼사진

여성운동가들은 아내며느리어머니동지로서 오늘날 ‘워킹맘’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슈퍼우먼’과 같은 존재였다. 헌신적인 희생정신은 남편과 동지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견인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였다. 동지로서 부부 인연은 아름다운 ‘들꽃’으로 탄생하는 벅찬 순간을 맞았다. 그럼에도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극소수 여성운동가만 언급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1세기에 부응한 역사교육을 위한 대안은 언제 사회적인 공감대와 함께 교육현장에서 이뤄질 수 있을까.

■ 최선화, 양우조와 만나다

최선화(이명 최소정)는 1911년 6월20일 인천부 구읍면 학익동(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황익동)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평양으로 이사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최선화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해 꿈 많은 재학시절을 보냈다. 재학 중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은 전문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많은 충격과 아울러 커다란 자극을 줬다.

1931년 졸업한 후 모교에 재직하면서 여성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가사과 김합라 교수의 소개로 양우조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당시 양우조는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울에 잠시 들렀다. 이러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 편지를 교환하며 교제를 지속했다.

그녀는 당초 미국으로 유학가려고 했으나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확인하고 결혼을 결심했다. 집안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나 결국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상하이 간호전문학교 유학을 구실로 ‘통행증’을 비교적 쉽게 발급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 딸 이름 영어식… 세계 속 한국인 활약 기대

상하이에서 간호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한 최선화는 1937년 늦은 나이인 27세에 41세의 양우조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준비와 예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차원에서 진행됐다. 결혼 준비는 임시정부 ‘파수꾼 엄항섭과 안살림꾼 연미당’ 부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결혼식은 진장 임시정부청사에서 김구의 주례로 임시정부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거행됐다. 최선화와 양우조는 결혼식을 끝내고 자신들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을 친지들에게 돌렸다.

신혼생활은 낯선 광저우에서 시작됐다. 중일전쟁 발발로 부부는 광저우를 떠나 류저우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최선화는 임시정부 가족의 일원이 됐다. 1938년 7월4일에 창사시 북문 밖에 있던 이태리 천주교당 의원에서 첫 딸 ‘제시(濟始)’를 얻었다. 1941년에 둘째 딸 ‘제니’도 낳았다. 딸 이름을 영어식으로 지은 이유는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활약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제시의 일기 원본과 백일사진

■ 여권 신장과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다

류저우에서 5개월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가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임시정부를 적극 뒷바라지했다.

치장으로 이전한 뒤에는 교포 부인들을 단합시켜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는 주비위원으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3·1운동 직후에 조직됐던 애국부인회 재건운동에도 착수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선언문을 발표했다. 최선화는 서무부장에 선출됐으며, 회장에는 김순애가 추대됐다. 애국부인회는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들에게 각성과 분발을 촉구했다. 위문품을 거둬 항일전선에서 활동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한편 여성과 청소년들의 계몽과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최선화는 총무(서무부 주임)로서 회의에 관한 일을 주로 맡았다. 1943년에는 미국 교포사회에 편지를 보내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을 알리고, 해외동포의 성원과 단결을 촉구했다.

최선화는 이를 묵묵히 지원하는 동지로서 알뜰한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남편의 항일운동 후원, 자녀 양육, 임시정부 지원을 하는 와중에도 여성들 존재감을 알리는 데 매진했다. 미주지역과 정보 교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 충칭 시내, 남안, 토교 세 곳에서 아동한글강습반을 운영했다. 임시정부는 매월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활동을 장려했다. 부인들은 가정과 교포학교에서 한글, 국사, 동요 등을 가르치며 자녀들에게 민족의식 배양에 노력했다.

매년 설날에는 교포들이 모여 많이 먹고 유쾌하게 놀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도록 다과회 등도 개최했다. 최선화는 이런 모임들이 망명생활에 큰 활력소가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1945년 봄에는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 있던 동포 위안부 10여명을 인계받았다. 한국애국부인회는 이들에게 임시정부 활동을 설명하고 민족혼을 불어넣는 정신교육에 치중했다.

광복 이후 귀국한 최선화는 1999년 국가보훈처에 자신이 소장해온 『독립신문』과 양우조의 저작물 등 42건을 수록한 독립운동사료집을 기증했다. 이와 별도로 남편과 자신이 집필한 『제시의 일기』를 외손녀 도움을 받아 출판했다. 1991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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