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홍유릉, 대한제국 ‘황제’의 능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순종의 무덤, 기존 왕릉과 지붕 등 형식달라 눈길
청량리 옛 홍릉 자리엔 영휘원만 남아… 명성황후 사후 사실상 중궁 역할 맡아, 생전 외교·사회·교육 개혁 큰 영향 미쳐

재실 옆문에서 바라본 홍릉 전경.
재실 옆문에서 바라본 홍릉 전경.

망국 황제의 부인 엄비… 조선의 미래 싹틔우다

홍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두 왕, 고종 부부와 순종과 두 부인의 무덤인데, 다른 조선 왕릉과는 사뭇 다르다. 진입로 양편에 석물들이 늘어서 있고, 제례를 올리는 건물이 丁자각이 아니라 사각형 정침이며 맞배지붕이 아니라 팔작지붕을 얹었다. 석물도 왕릉에 없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등이 추가되고 양은 빠진다. 대부분의 조선의 왕과 왕비들은 중국의 ‘번왕’ 자격으로 살다 죽었으나, 고종과 순종은 명색 대한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국의 황제들이다 보니 황릉이지만,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많다.

우선, 1910년 한일 강제합병 때 물러나 1926년 ‘이왕’(李王)으로 사망한 순종 이척(李拓)이 묻힌 유릉(裕陵), 동봉삼실(同峰三室) 합장의 극히 이례적인 형식이다. 다음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洪陵). 대부분 사람들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부근에 홍릉이 있다고 생각한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 암살당한 명성황후는 원래 청량리 근처 홍릉에 묻혔다. 그러나 1911년 고종이 승하하자 청량리의 명성황후 유해를 옮겨 남양주 금곡동에 함께 묻었다. 그래서 오늘날 청량리 ‘홍릉’에는 홍릉이 없고, 홍릉은 남양주 금곡에만 있다.

의민 황태자 능침.
의민 황태자 능침.

‘홍릉’ 없는 청량리 ‘홍릉’… 엄비의 영휘원만 남아

청량리 옛 홍릉 자리는 완전히 비어 있는가? 그건 아니다. 고종의 총애를 받던 순헌황귀비 세칭 엄비(嚴妃)가 거기 묻혀 있으니 이름하여 영휘원(永徽園)이다.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들켜 궁 밖으로 쫓겨났던 엄비는, 명성황후 사후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아, 43살의 늦은 나이에 영친왕을 낳고 사실상 중궁(中宮) 노릇을 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외교와 사회개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영향력을 피하기 위한 아관파천 즉 고종의 러시아 대사관 피난을 주도하고, 진명, 명신(후의 숙명) 학교를 설립하고 양정학교를 지원해 서양식 교육 보급에 한몫 크게 했다. 여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엄비는 해마다 학생들에게 무명 1필과 6백 냥씩을 내려 격려했다고 한다. 그러던 엄비는 고종 승하 반년 만에 급서(急逝)해, 자신을 박대하던 명성황후가 묻혔던 자리, 즉 옛 홍릉으로 가게 된다.

덕혜옹주 묘.
덕혜옹주 묘.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즉 영친왕과 그 비의 무덤 영원(英園)은 홍릉에서 돌아 나와야 5분 거리에 있다. 고종 입장에서 영친왕은 아관파천 직후 총애하는 엄비에게서 얻은 늦둥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영친왕은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망국의 왕자로 적국 일본 육사의 교수부장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고 ‘이왕’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남편과 함께 귀국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마사코)는 겸손한 삶으로 한국민의 존경을 받다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영원 바로 옆은 영친왕의 아들 황세손 이구의 묘 회인원(懷仁園)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귀국했다가 2005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덕혜옹주 묘와 의친왕 묘가 잇따라 나타난다.

이런 의문이 든다. 황태자 무덤을 ‘원’으로 친왕의 무덤을 ‘묘’로 부르는 것이 법도에 맞는가? 황태자는 번왕이나 친왕보다 서열이 앞서니 황태자 ‘능’이라 해야 옳다. 또 친왕도 ‘왕’이니 ‘능’이라 불러야 한다. 황태자니 친왕이니 하는 호칭이 조선에 없던 제도라 익숙지 않다. 고종이 칭제건원하면서 생긴 짧은 새로운 고민이다.

정면에서 본 홍릉 전경.
정면에서 본 홍릉 전경.

위기의 21세기 대한민국… 한 말의 교훈 되새겨야

한 말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수하고, 서원을 철폐하며, 무기를 개발하고 화약 재고를 늘리는 등 나름대로 개혁 정책을 폈다. 당시 3천만 발에 이르는 무기 재고로도 나라를 구하지는 못했다. 지금 한반도 주변 상황은 구한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북한은 핵개발을 가속화하고, 미국은 공사 구분 못 하는 부도덕한 지도자가 재선을 노린다. 장기집권이 계속되던 일본과 러시아도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점점 수위를 높여가면서 국제 정치의 변동성이 너무 커졌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덮쳤다. 고종도 명성황후도, 순종도 영친왕도 모두 떠났지만, 엄비의 유산은 100년 이상 지난 오늘날도 엄연히 살아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배워야 한다. 깨우치지 못하면 나라를 잃는다. 두보의 시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춘망(春望)

國破山河在,城春草木深。

感時花淚,恨別鳥驚心。

나라는 깨졌으나 산하는 여전하고,

성에 나린 봄에 초목 무성하구나.

꽃만 봐도 눈물이 흐르고,

이별의 한 때문에 새소리에도 놀라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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