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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9. 만주·연해주서 항일 투쟁 강재 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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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9. 만주·연해주서 항일 투쟁 강재 신숙

한국독립군 참모장 맹활약… 대전자령 전투 등 잇단 승전보

강재 신숙(申肅, 1885~1967)은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4대 독자였던 그의 이름은 연길이었다. 숙(肅)이란 이름은 35세가 되던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할 때부터 사용했다. 신숙은 일곱 살 때 천자문을 가르치던 조부가 한자 밑에 단 한글을 보며 뜻을 풀이하는 것을 보고 사흘 만에 한글을 완전히 터득했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였다. 12세 때부터 가평에서 명망이 높던 한학자 이규봉의 문하에서 배웠다. 신숙이 깊이 존경했던 스승 이규봉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자 신숙의 당부를 받고 고향 가평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분이다. 17세부터 지금의 면장에 해당하는 약정으로, 18세에는 가평군청의 서기가 되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19세가 되던 1903년, 을미의병 때 강원도 양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춘천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순국한 최도환의 딸 최백경과 결혼했다. 분주한 중에도 사색하기를 좋아하던 신숙은 세상의 변화에 주목했다. 이 무렵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치며 보국안민의 대의를 실천하고 있던 동학이었다.

신숙 선생 저서 ‘나의 일생’
신숙 선생 저서 ‘나의 일생’

■ 21세에 동학교도가 되다

1903년 12월, 신숙은 동학에 입도하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고백했다. 10년 전 갑오년에 동학도 수십만이 죽임 당한 사실을 알고 있는 부모가 눈물로 말리자 그도 동학을 배교한 것처럼 조용히 지냈다. 이듬해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이 ‘진보회’란 이름으로 세상의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목을 벨지언정 머리털은 벨 수 없다”던 시절에 동학당의 진보회원 16만 명이 일제히 단발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20세 청년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1905년 신숙은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고향을 떠났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던 그는 경무청에서 세운 경무학교에 입학하여 3주간 훈련을 받고 순검생활을 시작했다. 순검으로 재직하면서 대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야학으로 법률도 전공했다. 경무학교 특과생에 당선되어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당국이 승진 약속을 지키지 않자 순검을 그만두었다. 한시를 잘 짓고 문장에 뛰어났던 신숙은 <국민신보> 기자로 취업했다. 그러나 이 또한 마음에 차지 않아 반년 만에 청산하고, 1907년부터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취업했다. 이 무렵 교육이 나라를 살릴 길이라고 생각한 신숙은 동지 김남수, 김남규와 함께 청파동에 4년제의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학교 운영에 힘을 쏟았다. 항일의 영웅 이봉창 의사가 이 학교 출신이다. 업무가 끝나면 자녀를 둔 주민들을 만나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학생을 모집하고 다시 학교로 달려가 학생을 가르치는 생활이었으나 의욕에 넘쳤다. 애국단체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민중들을 대상으로 열정적인 강연도 벌였다.

1922년 북경 천도교 전교실 창립기념 단체사진(앞줄 가운데가 신숙 선생)
1922년 북경 천도교 전교실 창립기념 단체사진(앞줄 가운데가 신숙 선생)

■ 독립운동에 나서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 소식은 들은 신숙은 동지 정한교와 함께 동학의 가르침과 민중을 배신한 일진회장 이용구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단도를 가슴에 품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마침 이재명 의사가 총리대신 이완용을 저격한 사건으로 경비가 강화되어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 무렵 의암 손병희를 직접 면담한 신숙은 스승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고 평생 그 교훈을 실천하기로 다짐했다. 이 무렵 신숙은 시장에서 연설을 통해 천도교의 교리를 전파했다. 대중연설을 통해 도를 전파한 것은 천도교 역사상 처음이었다. 신숙의 눈부신 활동을 주목하던 손병희는 그를 천도교 대구대교구장에, 다시 중앙총부 대종사 종법원 겸 의사원에 임명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매국노와 일제의 하수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번졌다. 2월27일, 신숙은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의 지휘 아래 김영륜과 함께 밤새도록 인쇄한 2만 매의 독립선언서를 수레에 넣고 그 위에 석탄을 담아 석탄수레로 위장하여 교동 이종일 사택으로 운반하고 목사 함태영이 요구한 2천매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이를 배포했다. 3월1일, 신숙은 민족대표들이 모인 태화관 입구 중국요리점에서 동지들과 함께 한잔 술을 나누며 초조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 정각, 우렁찬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신숙도 헌병에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갇혔으나 기지를 발휘한 진술로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신숙은 천도교계의 제일선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하다가 5월1일에 다시 헌병대사령부에 체포되었다. 3차례 신문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하여 세 차례나 실신하는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 뜻밖에도 불기소 석방되었다. 일제의 회유책 덕분에 풀려난 것이다.

1954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1954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 중국으로 망명하다

1920년 봄. 신숙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요청한 천도교 대표에 선임되었다. 4월23일 밤, 캄캄한 어둠을 틈타 일제의 감시를 뚫고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무사히 상해에 도착한 신숙은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임정의 대표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했다. 임정에서 천도교에 절실히 바란 것은 운동자금이었다. 신숙은 상해에 머물면서 천도교를 전파하기 위해 <천도교의 실사(實事)>라는 작은 책을 펴내 활용했다. 45인의 교인동지를 규합한 신숙은 천도교인들의 일치된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통일당을 조직했다. 신숙이 정립한 통일당의 이념을 드러내는 삼본주의는 첫째 민본(民本)정치의 실현, 둘째 노본(勞本)경제의 조직, 셋째 인본(人本)문화의 건설이다.

상해 대한거류민단 의사회 의원으로 활약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도력을 인정받은 신숙은 1921년 4월, 8개 단체 대표들의 군사통일회의가 북경에서 열렸을 때 의장에 추대되고,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는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다섯 달 만에 임시정부를 두고 양분된 창조파와 개조파의 극한 대립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러한 심각한 갈등으로 신숙도 반대파 청년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25년 신숙은 국제공산당과 연합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김규식, 이청천 등 동지들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상해파의 이동휘도 이 사업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그 사이 레닌의 사망하자 소련 당국은 이제까지 태도를 바꾸더니 국경을 나가달라고 통고했다. 지원을 기대했다가 배신을 당한 신숙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만주 길림으로 돌아왔다.

심신이 지친 신숙은 마음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 엄숙하다는 뜻을 가진 숙(肅)이라는 이름 대신에 ‘큰 바보’라는 뜻의 태치(泰癡)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굳세다’는 뜻의 강재(剛齋)라는 호도 ‘바보 같은 사내’라는 뜻의 치정(癡丁)으로 바꾸었다. 같은 해에 고국에 떨어져 있던 신숙의 부모와 가족들이 무작정 만주로 찾아왔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면서도 활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북경에 한교동지회를 조직하여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생활안정을 지원하는 사업을 벌였다. 1930년에 북만주에서 지청천 등 민족주의 계열의 지도자 4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이때 신숙은 당의 총무위원장과 문화부장으로 활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한국독립당은 당 직속의 한국독립군을 창설했다. 신숙은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총사령관 지청전의 지휘를 받은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대전자령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신숙은 한국독립군 참모장의 자격으로 남경과 상해에 파견되어 국민당정부와 군사적으로 긴밀한 협력을 합의하기도 했다. 만주로 향하던 신숙은 배안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1935년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한동안 몸을 추스르고 지역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교민들의 생활개선에 집중했다. 그러나 신숙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신숙 선생 묘소
신숙 선생 묘소

■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다

1945년 8월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그리던 조국으로 당장 귀국할 수가 없었다. 연합군에 참전한 소련군이 만주로 진주하면서 치안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한인 동포들의 안전이 매우 불안했기 때문이다. 길림성 조선인들이 신숙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를 수락한 신숙은 조선인 피난민의 수습과 귀국 희망자를 주선하는 한편 소련군이 동포들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여성을 겁탈하지 못하도록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하여 협상하고 대책을 수립을 요구했다.

1946년 12월 신숙은 미군정이 주선한 마지막 난민수송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 후에도 중국에 남아있는 한인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하던 신숙은 1948년 4월, 남북협상연석회의 연락원 자격으로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분단을 막고 통일조국을 세우기 위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신숙은 천도교중앙총부 도사로 종교 활동에 집중했다. 1963년 정부는 신숙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신숙 선생은 살아생전에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몇 되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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