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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6. 제2의 안중근 꿈꾸었던 이수흥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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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6. 제2의 안중근 꿈꾸었던 이수흥 의사

권총 두자루 가슴에 품고 목숨 건 군자금 모금

이수흥 의사 옥중서한비
이수흥 의사 옥중서한비

1928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에서 포승줄로 묶인 22세의 조선 청년이 일본인 판사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대관을 암살해서 국체를 변혁하기 위해서였다.”

“참의부 명령을 받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단독으로 한 일이다. 안중근이 이등을 죽인 것을 본받고 싶었다.”

청년은 5척 단신이지만 태도가 당당하고 목소리도 단호했다.

■제2의 안중근 꿈꾸었던 22세의 청년

1926년 6월 10일, 경성에는 순종의 장례식을 기회로 3·1만세운동 때처럼 대한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7월 10일 저녁 경성 동소문파출소에서 밤의 정적을 깨는 총성이 울렸다. 파출소 앞에서 청년을 심문하려던 순사가 청년이 쏜 권총에 맞아 쓰러졌다. 두 달이 흐른 9월 9일, 이번에는 안성군 부호의 집에서 청년 두 명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며 군자금을 요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한 달여가 지난 10월 20일 안성군 백사면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에 권총을 든 청년이 총을 쏘고 사라졌다. 닷새가 지난 10월 25일에는 경성 수은동 전당포에서 한 청년이 권총을 겨누며 군자금을 요구하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일제는 사건 초기부터 많은 경찰을 풀어 범인 색출에 나섰으나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수천 명의 경찰을 동원하고서도 찾지 못하던 범인이 넉 달 만에 결국 체포됐다. 서울과 경기도를 몇 달간 떠들썩하게 했던 청년은 현상금을 탐낸 일가친척의 밀고로 체포된 것이다. 주모자는 이수흥(李壽興), 그를 도운 협력자는 이수흥의 친구 유남수와 그의 형 유택수 형제였다.

■외동아들이 세상의 차별에 맞서다

이수흥은 1905년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유학자 설산(雪山) 이일영(李日榮)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제자였던 이일영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때 이일영은 동문수학한 채상덕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채상덕은 만주로 망명해 무장독립단체 의군부 총재로 활약했다. 이일영은 두 번 장가를 들었으나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재혼한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줄 사람을 찾던 그는 원주에 사는 이씨 처녀가 혼처를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50대라는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장가들었다. 이런 까닭에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아 결혼 10년 만에 이수흥이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던 소년 수흥은 11세가 되던 1915년에 이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깊이 사귄 친구가 유남수였다. 이일영은 늦게 얻은 아들을 깊이 사랑했으나 친척과 이웃들이 수흥을 차별하자 1918년 봄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수흥의 부모는 이사한 후 사이가 더욱 벌어졌다. 수흥이 14세가 됐을 때 모친이 재가하고 말았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게 크게 상심한 수흥은 만세운동이 온 나라를 휩쓸던 1919년 4월에 학교를 자퇴하고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놀란 아버지가 절로 찾아와서 장가를 들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간절히 설득해 수흥의 승려생활은 2년 만에 마감됐다.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던 수흥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사진통신사에 들어가 잡일을 했다. 일터에서도 이수흥은 일본인 주인의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어릴 적부터 차별을 경험했던 수흥은 일제의 민족 차별정책에 분노하며 독립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수흥 사건이 포함된 판결 일람표.
이수흥 사건이 포함된 판결 일람표.

■일제의 심장을 저격하는 독립군으로 거듭나다

1922년에 만주로 망명한 이수흥은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지휘하는 아버지의 친구 채상덕을 찾아갔다. 채상덕은 의병운동을 함께했던 친구의 외아들인 이수흥을 친아들처럼 돌보아주고 이수흥도 채상덕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채상덕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이수흥의 다짐을 듣고 김좌진 장군이 사관 양성을 위해 세운 신명학교에 입학시켰다. 신명학교를 졸업한 이수흥은 채상덕을 따라 참의부 소속되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참의부는 1923년 창설한 이래 1925년까지 한만국경에서 벌어진 전투를 주도했다. 1924년 압록강을 시찰 나왔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한 사건도 참의부 소속 전사들이다. 참의부의 파상적 공세에 골머리를 앓던 총독부가 조선인 밀정을 통해 집안현 고마령에서 참의부 수뇌부가 회의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 1925년 3월 15일, 회의가 열리는 고마령을 기습한 일본 경찰의 집중 공격으로 참의부 사령관 최석순을 비롯한 간부와 부대원 42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겨우 살아남은 이수흥은 채상덕을 찾아가 사건의 경위를 알렸다. 같은 해 6월 11일, 일제는 만주 군벌 장작림의 지방정부와 비밀 교섭을 벌여 한인 독립운동 단체의 해산에 대한 협조, 독립운동가의 무장해제 및 체포 후 일본으로의 인계 등을 골자로 하는 미쓰야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참의부의 무장투쟁은 빠르게 위축됐다. 채상덕은 이수흥에게 참의부가 처한 상황을 알리고 권총 두 자루의 소재를 알려주며 안중근을 본받으라고 당부하고 자결했다.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모시던 채상덕의 자결에 이수흥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부상을 치료하고 유족을 돌보며 1년 상을 마친 이수흥은 스승이 맡겨둔 권총을 찾아 휴대하고 부대장을 만나 단독행동에 대한 허락을 얻었다. 이수흥이 권총 두 자루를 가슴에 품고 압록강을 건넜다.

1926년 7월, 걸어서 경성으로 잠입한 이수흥은 만주로 떠날 당시 총독부 급사로 일했던 친구 유남수를 찾았으나 친구가 일을 그만두고 이천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남수의 도움을 받아 총독을 암살하려 했던 계획은 잠시 미뤄두고 이천으로 향하던 이수흥은 동소문 파출소 순사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권총을 휴대한 것이 발각된 줄로 판단하고 순사를 향해 총을 쏘고 재빨리 현장을 벗어났다. 한밤의 총격사건으로 경성 시내에는 비상경계가 펼쳐졌다. 하지만 이수흥은 무사히 시내를 벗어나 이천에 도착해 유남수의 집을 찾았다. 이수흥은 유남수와 그의 형 유택수에게 자신의 신분과 입국 목적을 밝히고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투쟁에 함께할 것을 권했다. 형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위험한 일에 기꺼이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 9월 7일, 이수흥은 유남수와 함께 안성의 부자 박승륙을 찾아갔다. 이수흥은 그의 아들 박태병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잡으려 하자 사살하고 그 길로 안성을 벗어나 몸을 숨겼다.

2주가 지난 후 이수흥은 여주 식산회사 사장 이민웅의 집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민웅이 자선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해 자금이 없다고 해 순순히 믿고 나왔으나 곧 자신을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식산회사를 직접 찾아갔다. 회사 가까운 곳에 주재소가 있어 거사 후 퇴로가 차단될 위험이 있었다. 주재소를 습격한 후 식산회사를 찾아갔으나 이미 이민웅은 퇴근해 버린 상태였다. 이수흥은 그 길로 백사면사무소로 들어가 숙직 중이던 면서기를 저격하고 자금 확보하고 몸을 숨겼다. 한편 범인의 키가 5척이라는 정보를 확보한 이천경찰서장이 관내 5척 남자들을 모조리 조사하도록 지시했으나 범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때 이수흥은 아버지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해 발인까지 무사히 마친 이수흥은 경찰이 내건 현상금에 눈이 먼 친척의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이천 이수흥 공원에 서 있는 이수흥 의사 동상.
이천 이수흥 공원에 서 있는 이수흥 의사 동상.

■독립군의 마지막 유언

이수흥은 수감 생활을 하면서도 의젓했다. 명상과 독서, 감상록 집필로 일관하면서 담담히 집행을 기다렸다. 이수흥은 자신의 변호사에게 편지를 썼다. ‘혹시라도 갱생의 길이 있기를 비는 것은 단두대 위에 피를 뿌려 혼을 깨끗이 하는 것만 못합니다. 오탁한 세상을 구차히 살아서 치욕스럽게 삶을 끝내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택수와 남수 형제는 죄가 없으니 힘껏 변호하라. 내가 죽어서도 그 은혜는 갚겠습니다.’

1929년 2월 27일, 이수흥은 자신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찾아온 친지들에게도 유언을 남겼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해 주시기 바란다.”

사형을 당하기 전 술 두 잔을 마신 이수흥은 간수가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 가슴속에 품어왔던 생각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교수대를 향해 걸어갔다. 제2의 안중근을 꿈꾸던 이수흥은 25세의 청년으로 영원히 살아남았다. 이수흥 선생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6년이 지난 1968년에는 유택수 선생에게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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