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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4. 만주 무장투쟁을 후원하다… 무원 김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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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4. 만주 무장투쟁을 후원하다… 무원 김교헌

절망의 망국 국민… ‘단군 역사관’ 민족혼 깨우다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된 북로군정서 대원들,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된 북로군정서 대원들,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

“…궐기하라! 독립군!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 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는 같이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힘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는 자가(自家) 소유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 하겠느냐.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1919년 2월 초 중국 길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이 담대한 선언은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과 이동녕이 주도해 조소앙이 지은 것으로 2·8독립선언문과 3·1독립선언문에 영향을 주었다. 놀랍게도 서명자 39인 중 27인이 대종교인이다.

■ 역사의 격랑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발견하다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1868년 수원군 구포리(현 화성시 비봉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론이었으나 숙종의 국구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직계라는 배경을 가지고 정승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부친 김병희도 이조판서와 홍문관제학을 지낸 고위관료였다. 4형제의 장남인 그는 18세가 되던 1885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1892년에 성균관 대사성에 오를 정도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격동기에 관리로 살던 당대 지식인들의 인식이 바뀐 것은 여럿이지만 가장 큰 충격을 던진 것은 아마도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일 것이다. 놀랍게도 ‘독립신문’은 군수나 관찰사를 ‘백성의 종’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인민에게 권리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관리 김교헌도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해 10월29일, 김교헌은 1만 명의 청중이 지켜보는데 종로에서 열린 관민공동회에서 관(官)을 대표한 의정부 참정 박정양과 민(民)을 대표한 백정 박성춘의 연설을 들었다. 바야흐로 민중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평생 동지가 되는 유근(1961~1921)을 만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외교권이 상실되었으나 여전히 관직에 몸을 담고 있던 그는 외교문제가 첨예하게 격돌하는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1906년 10월, 동래부사 김교헌은 일본 통감부의 비호를 받던 일본인들의 침탈행위를 법에 따라 징계했다가 면직되는 수모를 겪었다. 망해가는 나라의 관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면직되어 귀경한 김교헌은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때 사귄 이동녕(1869~1940)은 평생 그의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

규장각 제학의 신분으로 김교헌은 ‘문헌비고’와 ‘국조보감’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때 그는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큰 뜻을 폈던 실존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무원 김교헌
무원 김교헌

■ 대종교에 입교하여 단군을 되살리다

1910년 8월29일, 국망을 당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약해서만이 아니었다. 김교헌은 최남선이 주도하던 조선광문회에 참여하여 조선의 명저를 시대에 맞게 출판하였다. 함께한 동지들은 박은식, 장지연, 유근 등이다. 이때 그가 소장하던 장서는 고전 편찬사업에 참고서로 활용되었다. 1911년에는 박영효를 총재로 내세운 문예구락부에도 현채, 류근, 정인보 등과 참여하였다.

국권을 되찾을 방안을 모색하던 김교헌은 운명적으로 홍암 나철(1863~1916)과 만나게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네 차례나 도일하여 일본 관리들과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담판을 벌였고,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권총을 들었던 열혈지사였던 나철은 1910년 1월15일 오기호, 유근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종교를 세웠다. 대(大)자의 뜻이 크다는 ‘한’이며 종(倧)은 단군을 가리키는 ‘검’이다. 대종교에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상동청년학원에서 교육운동아 앞장섰던 이동녕, 이회영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같은 역사학자들과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같은 한글학자들도 입교했다. 일제의 판단대로 대종교는 조국을 되찾으려는 열혈 지사들의 ‘소굴’이 되었다.

나철은 김교헌을 깊이 신뢰했다. 명문가 출신으로 고위 관직을 지냈지만 해박한 역사지식과 진솔하고 겸손한 그의 품성을 높이 샀던 것이다.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이내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다. 그것은 전설과 신화로 전해지는 단군의 실체를 역사문헌에서 온전히 되살려내는 과업이었다. 김교헌은 동지 유근, 박은식과 함께 수많은 사서에서 단군 관련 기록을 찾아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1911년에 펴낸 ‘단조사고’는 단군에 대한 자취의 처음과 끝, 문화적 흔적을 망라하고 있다. 이 책은 민족주의 사관의 밑거름이 되었고, 해외의 독립군들에게 무장투쟁의 이념을 제공하였다. 김교헌은 다시 연구에 몰두하여 1914년에 ‘신단민사’와 ‘신단실기’를 완성하였다. ‘신단민사’는 우리 민족의 뿌리가 광대한 영토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책이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를 침략한 원수의 나라라고 배웠던 요, 금, 원, 청나라 역시 단군민족의 후손의 나라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김교헌은 단군을 만나고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김교헌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서일은 러시아까지 가서 체코군으로부터 기관총과 박격포∙소총 1천200정을 구입했다.
김교헌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서일은 러시아까지 가서 체코군으로부터 기관총과 박격포∙소총 1천200정을 구입했다.

■ 무장투쟁을 위해 교단을 만주로 옮기고 망명하다

나철은 1911년에는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애국지사들이 대종교에 속속 입교하자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부령 제83호 ‘종교통제안’을 공포해 12월부터 포교활동을 전면금지하였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몰리자 1916년 8월, 제자 여섯과 함께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간 나철은 9일이 지난 15일, 호흡을 조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름이 지난 9월1일, 김교헌은 나철의 유명에 따라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올랐다.

1917년 3월, 김교헌은 서울 집과 땅을 팔아 마련한 자금을 가지고 만주로 망명했다. 총본사를 만주에 세운 그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대종교 전파에 전력을 쏟았다. ‘신단민사’를 비롯한 역사책도 보급하였다. 그가 저술한 ‘신단민사’는 동포들이 성경처럼 여기며 읽고 또 읽었다.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학생을 비롯한 총명한 청년들은 책의 내용을 전부 외울 정도였다.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신규식, 이동녕, 조성환 같은 이들도 대종교를 받아들였다. 김교헌은 이동녕과 함께 만주 전역에 46개에 달하는 시교당을 건립하였다. 시교당은 만주에 흩어져 살고 있던 100만 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1919년 12월 김교헌은 대종교 교인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 총재에 교단의 지도자인 서일, 사령관에 김좌진을 임명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이 불렀던 군가에는 결전의 의지가 충만하다.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들을/ 삼천리강산에 열혈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하느님, 저희들 이후에도/ 천만대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이 한 몸 깨끗이 바치겠으니/ 빛나는 전사를 하게 하소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는 일본군.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는 일본군.

이듬 해 9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일본군 정규군 1천3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여 승리한 것이다. 이 전투를 지휘한 홍범도 장군 역시 대종교인이다. 독립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한국인 대토벌 작전을 벌여 대종교인을 포함한 1만여 동포들을 학살했다. 김교헌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동만주 화룡현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1921년 8월 하순, 동지 서일이 토비들의 습격을 받아 밀산의 독립군 여럿이 희생되자 27일 산에 올라가 정좌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철을 이은 서일의 자결은 김교헌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열린 열강의 국제회의에 참관원을 파견하여 독립승인을 제의하고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기 위해 외국어에 능통한 8명을 외교대표원으로 선발 파견하였다. 이때 김교헌은 서재필(미국) 등과 함께 외교대표원으로 영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 승인은 의제에도 상정되지 않았다.

불꽃처럼 후반생을 치열하게 살던 김교헌의 심신도 지쳐갔다. 동포들과 동지들이 일제의 총칼에 무참히 죽어나가는 소식을 들으며 그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1923년 12월25일, 길림성 영고탑에서 고단한 그의 육신은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

단군을 중심에 둔 역사관을 정립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만주 무장투쟁의 숨은 공로자였던 김교헌의 위대한 삶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찬란한 빛이다. 또 하나,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10만의 대종교인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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