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1. 청년 교육·독립군 양성에 전념 규운 윤기섭

희망 잃은 망국의 청년들… 독립 ‘민족의식’ 깨우다

1943년 4월 중경에서 열린 자유한인대회에 참석한 윤기섭과 첫째딸, 왼편은 김규식 선생.
1943년 4월 중경에서 열린 자유한인대회에 참석한 윤기섭과 첫째딸, 왼편은 김규식 선생.

윤기섭은 1887년 4월 4일 파주군 파주리 마산동에서 유학자 윤기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였다. 윤기섭은 대여섯 살부터 문중에서 설립한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10세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강원도 철원의 부호이자 문장가였던 박초양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익혔다. 1906년 봄 윤기섭은 대한제국의 대신을 지낸 이용익이 세운 서울의 명문 사학 보성학교에 입학해 1909년 4월 제1회 졸업생 75명 중 수석을 차지했다.

■ 오산학교에서 인재를 기르다

보성학교를 졸업한 24세의 윤기섭은 그해 5월 평안북도 정주의 명문 사립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오산학교는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은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사학으로 명성이 높았다. 윤기섭과 함께 재직한 교사는 여준, 서진순이다. 탁월한 교육자였던 여준(呂準, 1862~1832)은 윤기섭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전국에서 몰려든 80여 명의 학생을 갑·을·병 3개 반으로 편성하고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매일 아침 운동장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윤기섭은 1909년 5월부터 1911년 5월까지 만 2년 동안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 기간에 윤기섭은 야학당을 개설해 ‘월남망국사’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아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헌신했다.

1907년 4월 안창호, 전덕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결성됐다. 윤기섭도 신민회에 가입해 학회활동과 계몽 강연에 힘을 쏟았다. 신민회 간부 중에서 웅변으로 이름을 떨친 인사로는 안창호, 이동휘, 전덕기, 이상재 등 여럿인데 윤기섭도 명연사로 활약했다. 1910년 11월 안중근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황해도 안악에서 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혀 관련자 160여 명이 처벌을 받았던 ‘안악사건’이 일어났다. 남강이 이 사건 주모자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면서 오산학교는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윤기섭은 망명을 결심했다.

■ 서간도에서 독립군을 기르다

1911년 8월 윤기섭은 압록강을 건넜다.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이회영, 이동녕을 비롯한 신민회 선배들이 터전을 닦고 있던 서간도 삼원보에 도착했다. 윤기섭은 교민자치기관 경학사(耕學社) 산하에 무관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할 때부터 깊숙이 참여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에 이동녕, 교감에 이달, 학감에 윤기섭, 교사에 이갑수 등이 임명됐다. 이후 그는 10년 동안 신흥무관학교에서 학감 및 교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군사 인재를 길러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을 지낸 원병상의 글 ‘신흥무관학교’에 등장하는 윤기섭의 모습이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분의 진실하고 인자한 성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1913년 3월 윤기섭은 교장 여준과 신흥무관학교 후원 조직이자 혁명 결사였던 신흥학우단을 조직했다. ‘혁명 대열에 참여해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다물단으로도 불리던 신흥학우단의 설립목적이다. 그러나 조국 광복까지 달려가야 할 길은 너무나 멀고 험난했다. 1912년부터 대흉작으로 식량난에 시달리고, 학생이 피살되는 사건 등 악재가 연거푸 발생해 이회영, 이동녕 같은 선배들이 서간도를 떠났다. 거듭하는 참혹한 시련에도 윤기섭은 김창환은 좌절하지 않고 학생들과 황무지를 개간하고 이웃 중국인 마을을 찾아가 품을 팔아 양식을 마련해 학교를 지켜냈다.

인성학교 교사 및 학생들.(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윤기섭 선생)
인성학교 교사 및 학생들.(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윤기섭 선생)

■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다

1920년 2월, 윤기섭은 3·1운동으로 뜨거워진 독립 열기를 독립전쟁으로 수렴하고자 서간도 삼원보 남산에서 임시국민대회를 발기했다. 임시회장으로 선출된 윤기섭은 이 자리에서 독립전쟁을 호소하고, 임시정부에 독립전쟁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고자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 자격으로 상해로 향했다. 2월 말 상해에 도착한 윤기섭은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을 방문해 서간도의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3월 초에는 임시의정원에 등단해 이진산, 왕삼덕과 함께 연명으로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을 만주와 연해주로 옮기고, 올해 내에 혈전을 개시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한 후에야 세계가 움직이겠고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당한 후에야 국민의 단합이 완성되리라.” 이 건의안은 그해 10월에 이뤄진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간도지역에서 독립전쟁이 전개되는데 기여했다.

1922년 10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설에 참여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병사를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한다는 목표로 노병회를 결성한 것이다. 윤기섭은 노병회의 교육부장으로 ‘보병조전(步兵操典)’을 편찬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차렷, 열중쉬어 같은 우리말 구령은 그가 만든 것이다.

■ 인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1922년 윤기섭은 인성학교의 학감으로 초빙됐다.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녀를 가르치는 인성학교에서 그는 한국역사와 국어를 가르쳤는데 어린이들에게도 높임말을 사용했다. 한글학자 김두봉도 그와 함께 교사로 헌신했다. 인성학교 졸업생들은 그가 청렴결백하고 지조가 높으며 희생심이 강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입을 모았다.

1923년 4월 윤기섭은 임시정부의 의정원 제7대 의장에 선출돼 의정원을 이끌었다. 윤기섭은 1935년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다. 1932년 초 윤기섭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성주식, 신익희 등과 함께 남경에서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 4월 상해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로 일경의 추적을 피해 활동 근거지를 남경으로 옮겼다. 윤기섭은 남경에서 중국인사와 교섭해 중한연합의용군을 조직하기 위해 진력했다. 이때도 그는 임시정부와 관계를 유지해 국무위원 및 군무장으로 활동했다.

윤기섭은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운동에 뛰어들었다. 각 세력의 통합논의를 거쳐 1935년 마침내 윤기섭은 약산 김원봉과 협력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비록 김구 세력이 불참했지만 민족혁명당은 단일대당으로 손색이 없었다. 윤기섭은 중앙 집행위원 겸 훈련부 부장을 맡아 군사훈련 방면에서 중국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7년 11월 윤기섭은 남경이 일본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민족혁명당 구성원들과 가족들을 인솔해 남경을 탈출해 이듬해 3월에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중경에 도착했다. 도착 후 중경에서 민족혁명당 중경 구당부를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단결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미·일 간의 전쟁인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을 국제공동관리로 하자는 논의가 진행됐다. 윤기섭은 국제공동관리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43년 윤기섭은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에 취임해 중국정부가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던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의 철폐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4년 6월에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생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윤기섭 선생 유묵
윤기섭 선생 유묵

■ 통일을 못 보고 운명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서둘러 귀국했지만 윤기섭은 중국에 남아 임시정부 가족들과 한인들의 귀국을 돕고 마지막으로 중경을 출발했다. 그가 부인과 어린 두 딸과 함께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1946년 4월이다.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한 후 35년 만의 귀국이었다.

남북연석회의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윤기섭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민족교육운동에 투신했다. 1948년 8월 위당 정인보의 뒤를 이어 국학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이 무렵 윤기섭은 고향 파주와 가까운 서울 불광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유롭게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납북됐다. 1953년 휴전 이후 윤기섭은 옛 동지 김원봉의 지원을 얻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윤기섭은 북한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여러 차례 벌여 건강이 악화해 1959년 2월 27일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운명하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갈라진 조국을 후세에 물려주게 되어 죄가 크다. 남부끄럽지 않게 살다 죽었다는 것을 후세들에게 전해다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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