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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0. 성서격동(聲西擊東)의 외교책략가, 남파 박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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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0. 성서격동(聲西擊東)의 외교책략가, 남파 박찬익

“광복군은 中의 노예군대가 아니다”… 중국과 담판

윤봉길의사 의거 때 폭탄을 만들어준 상해병공창의 중국인 왕백수 부부와 박찬익(뒷줄 오른쪽), 엄항섭(뒷줄 왼쪽), 백범 김구(앞줄 가운데).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윤봉길의사 의거 때 폭탄을 만들어준 상해병공창의 중국인 왕백수 부부와 박찬익(뒷줄 오른쪽), 엄항섭(뒷줄 왼쪽), 백범 김구(앞줄 가운데).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ㆍ1884~1949년)은 우의정을 지낸 창암(蒼巖) 박종악(朴宗岳ㆍ1735~1795년)의 후손이다. 실학파의 거두 박지원과는 일가이기도 하다. 남파는 민영환이 “조선 청년들아! 모든 인습적인 생각을 버리고 산업진흥과 공업 습득에 힘을 써라”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가 세운 상공(商工)학교에 진학할 것을 결심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틀을 깨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을 선택했으나 일본 선생과 불화 끝에 퇴학당하고 만다. 친구 박호원의 소개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백성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며 아버지를 설득해 집안 머슴을 속량한다. 이후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해 공업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예관(?觀) 신규식(申圭植ㆍ1880~1922년)과 만난다. 남파는 신규식을 따라 손문의 북벌전쟁에 참여해 주가화(朱家?), 오철성(吳鐵城), 저보성(?輔成), 진과부(陳果夫) 등 국민당 요인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게 된다. 남파는 대종교(大倧敎)에 가입하고 대종교 지회를 설립하면서 이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기도 한다.

일제가 을사늑약(1905년)을 체결하고 5년 후 조선을 강제로 병합(1910년)하자 남파는 국권회복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망명(1911년)한다. 반년 후 가족들 역시 전 재산을 처분하고 용정으로 이주하며 남파와 뜻을 같이한다. 남파는 만주에 망명하자마자 1911년 3월 대종교 독립운동단체 중광단을 서일과 함께 조직해 망명해 온 독립군들에게 민족정신으로 정신무장을 시킨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9인으로 서명하고,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중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치기도 한다. 또한 동북의 군벌 장작림(張作霖) 동생 장작상(張作相)을 만나 “한국의 독립 없이는 만주의 독립은 없다”고 설득해 보병총 300자루, 권총 10자루, 수류탄 150발, 탄환 5천 발을 조달해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남파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이 중심이 된 신민부(新民府) 요원으로서 대중(對中) 전임위원을 맡아 외교활동을 전개한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원, 법무부장, 외사국장 등으로 활약한다.

임시정부는 망명지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1940년 9월)한다. 그러나 1년 후에 중국국민당(이하 중국)은 한국광복군은 항일 작전 기간 중이나 압록강을 건너 한국 경내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별도의 협정이 있기까지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직속되어 참모총장이 장악해 직접 지휘한다는 내용을 임시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1941년 11월)한다. 임시정부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모욕적인 문서였다. 이대로라면 광복군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로 예속되어 ‘광복군은 중국의 노예군대’(군무부 차장 윤기섭)로 전락할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準繩)이다.

남파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조소앙,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 대표로 중국과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準繩) 폐지를 위한 교섭 실무를 담당한다. 교섭은 지지부진했다. 남파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돌파해야만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남파는 백범 김구와 같이 한국독립운동 지원 실무 담당자인 주가화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남파는 주가화에게 “미국을 가려고 수속을 밟으렵니다. 여권을 내주십시오. 독립운동 자금을 미국정부에 요청해 보려고 그럽니다”(남파 박찬익 전기)라는 기습적인 제안으로 중국의 허를 찌른다. 이른바 성서격동(聲西擊東)의 책략이었다. 한마디로 중국이 이렇게 임시정부에 비협조적이면 임시정부는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옮기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주가화는 남파의 담대하면서도 기발한 전략적 발상에 당황한다. 그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임시정부에서 가장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는 임시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받는 문제였다. 백범은 장개석과 1944년 9월 비밀리에 회담을 개최해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남파는 통역으로 배석한다. 얼마 후 장개석은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 폐지를 위한 실무 교섭을 추진하라고 지시한다. 1944년 9월 임시정부는 중국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은 한국 임시정부에 예속한다’는 원칙적인 합의를 이끌어 낸다. 1945년 4월 중국 측은 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에 이양하고 군사원조를 차관으로 바꿀 것을 골자로 한 ‘원조한국광복군 판법(援助韓國光復軍 辦法)’에 드디어 서명한다. 해방 넉 달 전의 일이었다.

주화대표단 사진 속의 박찬익(앞줄 오른쪽서 두번째).
주화대표단 사진 속의 박찬익(앞줄 오른쪽서 두번째).

남파의 격동책은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미국전략 특수공작대) 합작의 국내진공작전 준비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아! 왜적이 항복했다”(백범일기)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었다. 백범과 남파는 오철성을 만나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즉각적으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또한 한국의 운명이 강대국의 손에 좌우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남파는 백범에게 “임시정부가 빨리 동맹국의 승인을 받고 정부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야 합니다. 소련군이 오면 공산주의 세력이 일어날 것이니 광복군을 확대 강화해 이에 대항해야 합니다”라고 강력히 건의한다. 이에 백범은 장개석에게 “동맹 각국에 재차 임시정부를 승인토록 제의하고 최단 기간 내 실현시켜 달라. 적군 중 한적(韓籍) 사병은 무장과 함께 광복군에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복순(?純, 남파의 또 다른 이름) 또한 친분을 이용해 오철성에게 중국당국이 먼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동맹국도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제의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정부의 의사라며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개인자격’으로 입국하라는 통첩을 보내고 광복군의 무장을 회수해 갔다. 통탄할 일이었다. 내 조국, 우리 땅으로 들어오라는 주인은 임시정부가 아닌 미국이었다.

백범은 장개석 관저를 방문해 남파와 오철성 비서장이 배석한 가운데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 등 7개 항의 전후 수습책을 논의한다. 임시정부는 귀국 후의 연락 및 400만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그리고 귀국문제 등을 수습하기 위해 중국국민당 요인들과의 막후교섭 창구가 필요했다. 임시정부는 남파를 임시정부 주화(駐華) 대표단장으로 임명한다. 남파는 이청천(李靑天), 민석린(閔石麟)을 대표로 하는 주화대표단을 조직하고 남경, 상해, 북경, 대만 등 9개 성(省)과 광주 및 베트남의 교민회를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대표단은 가장 먼저 임시정부 요원 및 동포들의 귀국 경비를 마련하는 일에 착수한다. 또 만주를 방문해 동포들의 생활안정문제와 영농자금 등 시급한 현안 등을 당시 중국농민은행 총재 진과부와 협력해 처리한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약했던 아들 영준도 주화대표단 동북총판사처(東北總辦事處) 외무주임으로 일하며 조국에 돌아가지 못해 쩔쩔매는 동포들을 돕는 데 주력한다.

현충원에 잠든 남파 박찬익.
현충원에 잠든 남파 박찬익.

주화대표단의 또 다른 임무는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의 정치, 공산당 등의 동향과 남한의 정당, 정세, 미군 현황 등을 상세하게 분석하는 일이었다.(주화대표단의 한국현황보고) 남파는 주화대표단장으로서 오철성과 한국을 시찰하는 웨더마이어(Wedemeyer) 장군에게 한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미국이 재정적인 원조와 함께 한국이 독립적인 임시정부를 조직하도록 도와줄 것 등을 요청하는 비망록을 보낸다. 그러던 중 남파는 백범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급거 귀국한다. 그러나 인천 월미도에 도착했음에도 미군정 세관들이 일요일 근무를 하지 않는 관계로 하룻밤을 바다 위에서 뜬눈으로 보내야만 했다. 서둘러 경교장을 찾아갔으나 백범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남파는 백범이 병원으로 문병 오자 “백범 선생이 섣불리 남북협상을 추진한 것은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잠시 정계에서 은퇴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고 간곡히 권유한다. 그러나 한국독립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중지되고 말았다.(남파 박찬익 전기)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불변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 또한 그치질 않는다. 지정학적 위기의 연속이다. 남파의 ‘격동책’은 국제정세와 강대국의 상황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재활용할 수 있는 외교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남파는 외교에서 공식적인 채널도 중요하지만 인적 네트워크 활용도 매우 긴요한 전략 중의 하나임을 일깨워준다. 임시정부 100주년인 2019년. 한국 외교의 방향성과 전략에는 문제가 없는지, 인적 네트워크를 충분히 확보해 활용하고 있는지 남파는 묻고 있다.

권행완(정치학박사ㆍ다산연구소)

사진=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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