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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8. 붓으로 어둠을 밝힌 석농 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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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8. 붓으로 어둠을 밝힌 석농 류근

일제의 탄압에도 오로지 민족 대변 ‘정론직필’

용인 처인구 남동에 위치한 석농 류근 선생 묘 안내판, 석농 류근 선생의 논설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이 게재된 동아일보 창간호.
용인 처인구 남동에 위치한 석농 류근 선생 묘 안내판, 석농 류근 선생의 논설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이 게재된 동아일보 창간호.

석농, 언론의 힘을 발견하다

정론직필로 사회를 밝혀야할 언론이 ‘가짜뉴스’의 진원지로 지탄받는 세상이다. 이러한 시절에 언론인으로 망국의 어두운 시기에 한 점 불빛을 밝히 언론계의 어른이 있다. 바로 석농 류근(柳瑾,1861~1921)이다.

류근은 1861년 9월26일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뛰어나 수재로 알려졌던 류근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남에게는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그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호 석농(石?)의 농은 ‘나’를 가리키는 것이니 ‘나는 돌이다’란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동학농민전쟁으로 갑오개혁이 단행된 1894년, 나이 34세의 류근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빼어난 실력을 갖추었기에 그는 이듬해 김홍집 내각에 참여해 탁지부 주사로 관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의 개혁정책에 희망을 걸었으나 이듬해에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896년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이 벌어졌다. 러시아에 기댄 고종이 김홍집 내각을 붕괴시키는 바람에 류근도 그해 4월 주사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첫 도전은 무참히 꺾였으나 실의하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힘이 무엇인지 찾던 그는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주목했다. 한글로 만든 신문을 기반으로 토론회를 통해 민주적 절차를 익히게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시민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했다. 새로운 길을 발견한 류근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각종 토론회를 지도하고 11월의 만민공동회 때는 간부로 활동했다. 이때 평생 동지가 되는 남궁억, 장지연, 박은식 같은 동지들과 사귀게 되었다. 특히 가깝게 지내던 장지연의 아들과 그의 딸이 결혼하여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황성신문으로 잠든 겨레를 깨우다

1898년 4월 류근은 동지 남궁억, 박은식, 장지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일간지로 발행했다. 이때 류근은 주필과 논설위원으로 활약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18일 류근과 장지연은 한 방에서 밤을 새웠다. 이날 장지연이 을사조약을 폭로, 규탄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하노라]’를 썼다. 그런데 폭음으로 장지연이 논설을 끝맺지 못하고 쓰러지자 뒷부분은 류근이 마무리했다. 이 사설은 류근의 독려로 밤새 인쇄되어 전국에 배달되었다. 붓의 힘은 컸다. 동포의 궐기를 촉구하는 이 사설은 항일의병투쟁에 불을 지폈다. 이 일로 류근과 장지연을 비롯한 10여명 사원이 구속되고 신문은 무기한 발행이 정지되었다. 그도 2년 동안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한편 류근은 민족운동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에 가입하고, 해산 후에는 1907년 11월에 남궁억, 오세창 등과 함께 대한협회를 발기했다. 1907년 4월 도산 안창호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하여 언론·출판·교육 부분에서 활동했다.

1907년 9월 제5대 사장으로 선임된 류근은 폐간될 때까지 3년간 재임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구국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한일병합 직전 일제는 그의 입을 막으려 거금을 제공하려 했으나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황성신문을 비롯한 모든 신문을 폐간시켰다.

교육과 출판으로 나라의 장래를 기약하다

1915년 4월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촌 김성수가 인수했다. 김성수는 저명한 언론인지자 역사학자인 류근을 중앙학교 교장으로 추대하고 학감은 와세다대 출신의 민세 안재홍을 선임했다. 류근은 안재홍과 함께 김성수 집에서 신입생 환영다과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불어넣었으며, 가을 수학여행 때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제단에 절을 올려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에게 나라 없는 슬픔을 일깨웠다.

학교 일로 바쁜 와중에도 류근은 우리 역사와 지리, 국학연구에 몰두했다. 박은식, 김교헌 같은 동지들과 최남선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하여 국학 관계 고문헌의 출판에 힘을 쏟았다. 조선광문회는 ‘동국통감’,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 ‘택리지’, ‘훈몽자해’, ‘용비어천가’, ‘산림경제’, ‘열하일기’ 등 모두 22권의 책을 간행했다. 류근은 고전간행에 힘쓰며 사전편찬에 상근고문으로 참여해 최초의 현대판 ‘신자전(新字典)’을 펴냈다. 신자전 편집동인은 국어사전 편찬도 함께 준비했는데, 이 사업은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편찬의 모태가 되었다. 류근은 역사서 편찬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그가 펴낸 ‘신정동국역사’(1906)와 ‘초등본국역사’(1908), ‘신찬초등역사’(1910)는 모두 초등·중등용 교과서로 집필된 것으로 단군 이래 근세까지의 우리 역사를 서술한 최초의 교과서이다.

1909년 나철이 단군교를 창립했다.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를 ‘조선의 정신적 식량’으로 생각했던 류근은 박은식, 신채호 등 동지들과 대종교인이 되었다. 1917년 대종교 2대 교주로 취임한 동지 김교헌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포교와 독립운동에 투신하자, 류근은 서울 남도본사(南道本司)에서 강우 등의 간부진과 교무를 전담하여 해외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같은 해 류근은 안재홍, 김성수 등 130여 명과 함께 교원과 학생들에게 조선물산장려계를 지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하고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석농 류근 선생의 묘.
석농 류근 선생의 묘.

60세에 동아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맡다

3·1운동 직후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자, 류근은 4월에 개최된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한성정부의 정부체제 선택과 각료 선정에 참가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한동안 구속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그동안 금기시됐던 민간신문의 창간운동이 일어났다. 중앙학교에 있던 류근의 집에 29세의 민세 안재홍이 신문 창설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만큼 신문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달리 없었던 것이다. 신문창간에 뜻을 모은 두 사람은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 출신 이상협과 평양일일신문 기자를 지낸 장덕준, 오사카아사히 기자로 근무했던 진학문과 함께 신문발간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신문발간을 위해서는 큰돈이 드는데 자금의 턱없이 부족했다. 이들은 김성수를 찾아가 신문사를 경영해 보자고 졸랐다. 그러나 김성수는 중앙학교와 경성방직의 일에 전념하겠다며 고사했다. 청년들은 김성수가 존경하는 류근을 앞세웠다. 류근의 권유와 설득에 김성수도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류근은 창간하는 신문의 제호를 ‘동아일보’라고 지었다. 우리 민족이 장래 풍요롭게 살아가자면 동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60세의 류근이 양기탁과 편집감독에 취임했다. 사장 김성수는 30세, 주간 장덕수는 26세, 편집국장 이상협은 28세였다. 류근은 함께 편집감독으로 추대된 양기탁보다도 열 살이 많았다. 류근은 창간호 1면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이라는 논설을 써서 신문의 편집 방향을 알렸다.

“동아일보야, 너의 부담 무겁도다. 너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이다. …너는 조선민중의 권리보호자이다. …너는 조선민중의 문화소개자이다. …그러면 너는 조선 민중의 기관수며 우편배달부며 전화교환수며 대의사며 정치가며 법률가며 경제가며 사회당이며 노동주의자이다. 무겁다 너의 책임, …아, 동아일보야.”

류근은 60세에 여러 청년들에 의해 편집감독으로 추대되었지만 ‘노청년’이라 불릴 만큼 젊은이들과 잘 어울렸다. 그는 이른 아침에 신문사에 출근하여 자고 있는 젊은 기자들을 깨워 국밥 집으로 데려가 밥을 사 먹였던 어버이 같은 대선배였다.

류근 선생의 저서 ‘초등본국역사’, 석농 류근 선생의 묘비.
류근 선생의 저서 ‘초등본국역사’, 석농 류근 선생의 묘비.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가

류근은 잦은 감옥생활과 오랜 숙환으로 1921년 5월20일 소격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61세.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혀 있던 아들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이튿날인 21일자로 부음을 알리고 22일자 1면에 ‘조(弔) 석농 유근선생’이란 장문의 조사를 실었다. “선생은…우리 반도 언론계의 원로이며, 평생을 사회에 바쳤으니 다만 교육계의 공로자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장로이었다.” 상해의 임시정부도 고인을 위한 추도식을 거행했다.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에는 ‘유근 선생의 유언’이라며 “지방열(地方熱)을 제거하라”는 글을 실었다.

“지방열을 없애라. 이것은 조선인의 고질이니 사회를 위하여 활동하는 자, 민족을 위해 일하는 자는 마땅히 이에 조심하여 그 근멸을 기하라.”

한국 언론계의 선구자 석농 류근의 묘소는 용인 처인구 김량장동 현충탑 아래 노고봉 산기슭에 있다.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증 받았고, 2001년 10월 국가보훈처 등에 의해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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