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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5. 해평 이재현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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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5. 해평 이재현 지사

1945년 8월 14일 이륙 '일제 항복' 작전 물거품

해평 이재현 지사
해평 이재현 지사

“원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때려 부셔 내 조국의 독립을 찾을 수 있는 최후의 기회였다. 가슴에는 피가 끓어올랐다. 8월 8일 새벽 출발 예정이었으나 대기 상태로 비행기는 뜨지 않았다. 9일 본부로 되돌아왔다. 일제가 무조건 항복했던 것이다. 조국 독립의 기쁨보다 우리는 땅을 치고 울었다. 내 몸을 바쳐 조국독립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에서였다.”

-해평 이재현의 회고록 ‘에스페란토와 나’ 중에서

 

광복군, 통한의 눈물을 흘리다

1944년 겨울부터 이재현(1917~1997)을 비롯한 한국광복군은 미국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협약을 맺고 현서성 종남산에서 국내로 진공하기 위해 낙하훈련을 비롯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임정 주석 김구는 OSS책임자와 한미 간의 공동작전을 협의하고 OSS훈련을 받은 광복군을 본국으로 들여보내 국내의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 또는 점령하게 한 후에 미국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5년 8월 7일, 이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이 참석한 자리에서 생사를 같이할 동지들과 함께 수료식을 마치고 국내 낙하3조장으로 지리산을 담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수료식 하루 전날인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일제가 곧 항복할 것을 직감한 광복군은 다음 날 새벽에 출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제가 당일 항복하면서 작전계획이 모두 취소되었다.

눈물을 삼키며 본부로 회항했던 광복군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았다. 미군 22명과 광복군 5명의 선발대가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작전이었다. 8월 14일 이재현은 제2지대장 이범석과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이계현 등의 광복군 6인과 미군 22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14일 새벽 4시에 서안비행장에서 이륙했으나 6시간 40분 후 회항하라는 본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군의 최후 발악이 극심하다는 이유였다. 18일에 다시 출격하여 여의도에 착륙했으나 같은 이유로 되돌아왔다. 9월에야 중국전구사령부에서 작전권을 넘겨받은 태평양전구사령부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안타깝게도 광복군은 이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백범이 그토록 열망한 한국독립문제에 대한 발언권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 일은 청춘을 고스란히 독립운동에 바친 광복군 이재현에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 미국전략사무국(OSS)서 특수훈련 시절 이재현 선생(뒷줄 가운데)과 이범석 장군(앞줄 가운데). 이재현 지사의 형 이재천 지사가 수사기관에 송국됐다는 당시 기사. 이재천 지사 등 오대사상사건과 관련 공판기일이 결정됐다는 당시 기사.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한 혁명을 동반자처럼 생각하겠다는 ‘혁명반려’ 휘호.
 미국전략사무국(OSS)서 특수훈련 시절 이재현 선생(뒷줄 가운데)과 이범석 장군(앞줄 가운데).

 이재현 지사의 형 이재천 지사가 수사기관에 송국됐다는 당시 기사.

 이재천 지사 등 오대사상사건과 관련 공판기일이 결정됐다는 당시 기사.

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한 혁명을 동반자처럼 생각하겠다는 ‘혁명반려’ 휘호.

 

형제가 독립운동에 나서다

안양 자유공원에는 독립투사 이재천(1907~1941)과 이재현 형제가 손을 잡고 있는 동상이 서 있다. 형제의 아버지 이용환은 백범 김구와 뜻을 같이한 지사로 온 겨레가 일어선 1919년 3·1운동 직후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광복 후 백범 김구는 광복까지 지조를 지킨 이용환의 이름을 ‘백범일지’에 실어 동지의 의로운 삶을 기렸다. 이렇게 형제는 유년시절부터 중국 상해에서 백범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상해의 조계지는 1842년 아편전쟁에 패배한 후에 열강들에게 분할 점령된 곳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온갖 나라 사람들이 살았던 국제도시였다. 형제는 독립지사와 교포들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인성소학교를 다녔다. 이재천은 1930년 임정 국무위원 조소앙의 지도하에 화랑사를 조직하여 단원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화랑보’을 펴냈으며, 1931년에는 백범의 지도하에 상해 소년동맹의 위원장으로 월간지 ‘새싹’을 발간하여 상해 교민사회에 전달하고 국내에도 발송했다.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이재천은 그해 10월에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하다가 정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동아일보 1935년 3월 10일자에 ‘중국에서 한·중·러의 3국인 암살훈련단인 려지사(勵志社)를 조직하고 단원 이재천 등 20여명을 한국 만주 일본에 파견하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11월 하순, 이재천이 인천에서 검거되고 말았다. 이듬해 2월 28일 이재천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같은 해 1935년 여름, 18세의 이재현은 백범에게 해평(海平)이란 호를 하사 받고 이해평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해에 이재현은 30여 명의 중앙군관학교에 소속된 한국인 청년들과 함께 안휘성의 변경에 있는 용지산 깊은 산속에서 특별훈련을 받았다. 그가 특수훈련을 받고 이듬해에 배속 받은 임지는 중국의 남단도시 광동성 광주였다. 이때 이재현은 백범의 큰아들 김인(1917∼1945)과 함께 백범 김구의 특명을 받고 광동성 광주시에 파견되었다. 이 도시에 있는 중산대학에 유학을 온 한국학생을 포섭하여 독립군으로 만드는 특별임무를 띤 비밀공작대원이었다. 이곳에서 공작대를 지휘하는 교관이 안우생(1907~1991)을 만났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우생은 영어, 불어, 일어 등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노신의 소설을 중국 최초로 번역했던 실력자였다. 안우생은 이재현과 의기투합하여 희망의 말,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했다.

광복군 단체사진
광복군 단체사진

1937년에 일본군의 침공으로 중산대학이 있는 광주일대가 함락되어 이재현은 학업을 그만 두고 상해지하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김인, 이하우 등과 함께 홍콩으로 파견되었다. 홍콩에서의 임무를 완수한 이재현은 중국의 임시 수도인 중경으로 다시 활동무대를 옮겼다. 훗날 그는 “나는 30년 동안 중국 천지를 걸어서 3분의 2는 다녀보았다.”고 회상했다.

1939년, 이재현은 중경에서 나월한, 이하우, 김인, 김동수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직하여 선전반장을 맡았다. 특별한 임무를 띠고 중경을 떠나 본부로 삼은 협서성 서안으로 이동했다. 서안에서 중화민국 전시간부훈련 한청반 교육을 수료하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분대장에 임명되어 태행산 유격지구에 파견되었다. 이재현은 교전이 벌어지는 최전선에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펼쳐 한국인 청년을 모아 광복군으로 훈련시켰다.

이 무렵, 형 이재천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1년 2월 26일까지 만기 복역한 기록은 있으나 행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옥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지대장 나월한이 부하들에게 희생되는 사건으로 그도 혐의를 받아 법정에 서야했던 고통스런 시기였다. 그러나 광복을 위한 투쟁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이재현은 1944년부터 광복군 제2지대 한미합동훈련반 특별반의 조교로 한국에 투입될 대원들을 가르쳤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이 예상보다 빠르게 항복하는 바람에 이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때 그가 지은 광복군 제2지대 군가는 광복군의 열망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총 어께매고 피 가슴에 뛴다/우리는 큰뜻 품은/한국의 혁명청년들/민족의 자유를 쟁취하려고/원수 왜놈 때려 부수려/희생적 결심을 굳게 먹은/한국광복군 제2지대 /앞으로 끝까지 전진/앞으로 끝까지 전진/조국독립을 위하여/우리민족의 해방을 위해

1945년 10월, 이재천은 한국광복군 국내정진군 주임으로 북경에 파견되어 귀국하는 교포의 민정을 지원하면서 일본군 대본영으로부터 한국 국적을 가진 병사들을 인수 받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받은 병력으로 1개 대대를 개편했는데 일본군 대위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과 만주특설대 중위 박정희도 있었다. 단체로 입국을 계획하던 광복군 지도부는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자들도 중국군의 한국인 학도병 자격으로 광복군에 입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광복군의 세를 불려 귀국하려는 조치였으나 매우 잘못된 판단이었다. 1946년 6월, 이재현은 미군정의 지시로 군복을 벗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지 못한 것이 뼈에 사무쳤다. 임정 주석 김구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지분을 요구하지 않은 투사

이재현 선생은 고심 끝에 군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20년 경력의 광복군 장교라는 빛나는 경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 대신 만인 평등과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에스페란토 연구와 보급에 헌신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평등과 평화를 추구하는 언어 운동인 에스페란토가 답답한 조국의 현실에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1963년 3·1절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노 독립투사 이재현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 을 만났다. 박대통령이 선생을 반기며 청와대에 초청했으나 선생은 청와대를 찾지 않았다. 광복절에 다시 한 번 더 초청했지만 역시 가지 않았다. 이후 다시는 선생을 더 부르지 않았다. 그 당시 선생의 생활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이 있겠어.”

독립유공자로 연금을 받게 되자 선생은 그 돈을 모아 ‘예스 한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재현 선생이 자녀에게 가르친 말은 단순명쾌했다. “현실에 맡겨진 일에 충실하라, 그것이 곧 애국이다.” 선생은 운명하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투사는 결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김산(홍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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