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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2. 조국의 운명을 죽음으로 알린 이한응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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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2. 조국의 운명을 죽음으로 알린 이한응 열사

제국주의 광풍 속 처절한 외교전… 불꽃같은 생애

이한응 열사와 부인 진양강씨
이한응 열사와 부인 진양강씨

“슬프다!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을 잃었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라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을 수 있으리오. 슬프다. 종사가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남의 노예가 될 것이니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만이 더할 따름이라. 이 어찌 죽음보다 나으리오. 내 결심한 바 있으니 여기서 더 할 말이 없다.”

주영서리공사(駐英署理公使) 이한응(李漢膺, 1874.10.30.~1905.5.12.) 열사가 동포들에게 남긴 피끓는 유서이다. 그는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 영국을 상대로 외롭게 외교활동을 펼쳤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청나라 ‘천하’질서를 무너뜨린 그 영국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사냥터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조선은 도덕 만능의 주자학으로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이한응 열사 묘소
이한응 열사 묘소

이한응은 일제가 운요호 사건(1875)을 일으키기 한 해 전에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한학(漢學)을 배웠다. 그러다 15살 되던 해인 1889년 서울에 있는 관립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한다. 육영공원은 당시 정부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근대학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특별히 세운 학교였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2년 동안 영어와 수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학 등 근대학문을 배우고 1891년 졸업한다. 그러나 육영공원을 졸업하는 것만으로는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어보려는 뜻을 펼칠 수 없어(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전통적인 과거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1894년 특별과거시험(司馬試)에 응시하여 성균관 진사로 합격하였다. 이한응은 신학문과 전통유학을 겸비한 인재였다. 1899년에는 관립 영어학교 교관으로 임명되고 2년 후 1901년에는 런던주재 대한제국 참서관(參書官)으로 임명된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전권대사로 파견되었지만 유럽 국가에는 아직 외교관 파견이 없는 상태였다. 1901년 이한응은 민영돈 공사를 수행하는 참서관으로 팍스 브리테니카(Pax Britannica)의 중심지 영국 런던의 상주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

부인에게 남긴 유서, 형님에게 남긴 유서
부인에게 남긴 유서, 형님에게 남긴 유서

당시 국제사회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도덕적 법적 제약도 받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무제한 추구하는 마키아벨리적 전통(이상우, 국제정치학강의)에 익숙해져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제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러시아가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만주를 점령하자 영국과 동맹을 체결(1902년 제1차 영일동맹)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하려 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과 만주 지배권을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개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군사적 충동사태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입장(강광식, 중립화와 한반도 통일)과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시국외중립선언을 비밀리에 기획한다. 고종은 러일전쟁 발발(1904년 2월 8일) 바로 직전인 1904년 1월 23일 중국 치푸(芝?)에서 기습적으로 한국의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위시하여 일본,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중립선언 외교문서를 접수한 그 어떤 국가도 지지 표명은 없었다. 고종의 공식적인 전시국외중립 외교가 거의 무산될 즈음에 영국에서는 민영돈 공사가 해임되어 귀국하였다. 이한응은 1904년 초부터 서리공사직을 맡아 영국을 상대로 독자적으로 외교업무를 수행했다. 이한응은 러일전쟁 약 3주 전인 1월 13일과 19일에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동아시아 지역체제(regional system)를 범세계적 차원의 세력균형체제와 연계시켜 ‘한반도 중립화 방안’이 담긴 장문의 메모와 각서를 전달하였다.

여권
여권

이한응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강대국 간에 서로 견제하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상태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유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동아시아는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 러일전쟁으로 인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유럽도 무너지게 되며, 이는 전 세계적인 세계균형체제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이한응은 1차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균형자(balancer)가 되어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의 분쟁을 조정해 달라고 촉구한다. 이는 한국의 독립, 주권, 영토의 보존이 곧 세계평화와 직결된다는 것을 역설하려 한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한다. 영국은 일본과,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각 당사국은 4개국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동시에 한국과 만주를 보호하여 동아시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구상이다. 국제정치를 보는 이한응의 통찰력은 탁월했으나 그 판을 움직일만한 힘이 없었다. 강대국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한 반면에 약소국 외교관은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이한응은 2차적으로 장차 러일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국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가 작성하여 영국 외무성에 전달한 각서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 영토 및 특권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을 요망”하는 중립화 방안이었다. 첫째, 영일동맹에 의거하여 한국의 독립·주권 및 영토보존을 보장할 것, 둘째, 어떠한 침략적인 국가가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한국 정부를 지배하려 기도할 경우 이를 방지할 것, 셋째, 어떠한 침략적인 국가가 한국 내에 있는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만한 소요가 발생하지 않을 경우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지로 군대를 파병하는 행위를 금지할 것, 넷째, 만약 한국 내에 소요나 폭동 사태가 발생하면 한국 정부가 먼저 그 주권행사에 의거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의무를 다할 것, 다섯째, 러일전쟁이 발발할 경우 영국 정부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전쟁의 결과에 관계 없이 열강과의 양해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주권 및 영토보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 등이었다.

이한응 일지
이한응 일지

영국정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에도 이한응은 캠벨(Campbell) 차관보에게 다시 서신을 보내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고 시도했으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한응은 동아시아 담당자 랭글리(Langley)와 회담한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러일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 한국의 독립이 보장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이한응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우군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영국 외무성에 대한 수차에 걸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정부는 노골적으로 냉담했다. 절망적이었다. 그 해 4월부터 괴한 2명에게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 그는 영국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영국 외무성 고위관리에게 면담도 요청했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의 한복판에서 세계를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하다 경각에 달린 조국의 운명을 직감하고 1905년 5월 12일 “시운이 이렇게 되니 다만 죽을 뿐이요, 살길이 없습니다.”(兄主前上書)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장엄하게 순국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6개월 전이었다.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그야말로 불꽃같은 생애였다. 루마니아의 ‘25시’ 작가 게오르규가 잠수함에 산소가 부족하면 가장 먼저 토끼가 죽는다고 말했듯이 이한응은 조국이라는 잠수함 속의 토끼였다. 조국은 그의 예언대로 6개월 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1905)이 강제로 체결되더니 급기야 1910년에는 병탄(倂呑) 되고야 말았다. 그의 유해는 “사체가 고국에 돌아가는 날에는 용인 선산 밑 양지에 깊이 묻어”(兄主前上書) 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해 7월 해로로 고국에 반장되어 경기도 용인 이동읍 덕성리에 안장되었다. 고종황제는 서울 중구 장충단(?忠壇)에 기념비를 건립하여 이한응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자 하였다.

국제정치 현실은 엄중하다. 조선은 제국의 사냥터가 되었다. 세계열강들은 잔인하게 묵인했다. 조선은 제국의 핵심이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역학관계 속에서 쓰러져 갔다.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는 불변이다. 미중의 패권경쟁 또한 치열하다. 약소국의 자존양식인 중립화 이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역사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잠수함에 아직도 토끼가 죽어야만 산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지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순국열사 이한응 선생 기념비
순국열사 이한응 선생 기념비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사진=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소장자 이민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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