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1. 농촌계몽의 선구자 최용신

일제 악랄한 수탈… ‘절망의 농민’ 깨운 상록수 주인공

1930년대까지 2천만 한국인의 8할이 농민이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농촌에서 식민지 조국의 희망을 찾기 위한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청년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를 외치며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는 농촌으로 들어가 아동을 모아 야학을 열고, 성인들을 위한 한글 강습과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을 줄기차게 벌여나갔다.

조선의 희망을 농촌에서 찾자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 최용신은 1909년 8월 원산과 가까운 함경도 덕원에서 아버지 최창희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사립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을 했던 분이며, 아버지는 교육자로 1927년 신간회운동이 벌어졌을 때 덕원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한 분이다. 최용신은 개화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반듯했으나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곰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용신은 이에 주눅 들지 않고 남 앞에 나서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는 당찬 아이였다. 최용신이 공부한 원산 루씨여고는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3·1만세운동은 물론 농촌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최용신은 전희균에게 참된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를 배웠다. 최용신은 이 학교에 다니면서 제때에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애를 태웠고 4년 동안 “점심을 끊었다”고 할 정도로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이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자신은 행운아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8년 4월 1일자 조선일보에 최용신의 얼굴 사진과 ‘교문에서 농촌으로’란 글이 실렸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협성신학교 시절 최용신.(앞줄 오른쪽)
협성신학교 시절 최용신.(앞줄 오른쪽)

1929년 최용신은 서울에 있는 감리교협성신학교로 진학하여 정인보, 정경옥, 조병옥 같은 교수들에게 역사와 사회학과 신학을 배웠다. 교장 채핀 부인은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신학교에 여성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개설하고 황애덕 교수에게 그 일을 맡겼다. 황애덕은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송금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 독립지사였다. 최용신을 농촌운동가로 이끌었던 황애덕은 방학이 되면 학생을 둘씩 짝을 지워 농촌으로 파송해 계몽운동에 참여시켰다. 그 해 여름방학에 최용신은 김노득과 함께 황해도 수안에서 석 달을 지내며 농촌의 현실과 농민들의 어려운 살림을 체험하였다. 1931년 봄, 최용신은 교장 케이블 박사와 몇몇 교수들이 한국의 문화를 낮추어보고 한국인을 차별하는 태도에 분노하여 동맹휴학을 모의하고 이를 전교생에게 알리다가 주동자로 지목되어 징계를 받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신학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 재학시절부터 농촌과 농민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최용신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한편 조선총독부에서도 1931년부터 정책적으로 농촌진흥운동을 펴고 있었다. 농민의 생활을 윤택하고 안정시키는 것을 표면에 내세웠으나 그 목적은 일본이 대륙 침략 전쟁을 수행할 때 필요한 군량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농촌계몽운동은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운동에 가장 앞장 선 단체는 기독교청년회와 사립학교와 3·1운동으로 창간된 조선·동아·조선중앙 세 신문사였다.

최용신 묘지.
최용신 묘지.

샘골에 울려 퍼지는 희망의 노래

1931년 10월, 최용신은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에 파견되었다. 샘골교회 예배당을 빌려 아동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최용신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노래와 춤, 연극, 연설 등으로 구성된 발표회를 준비하여 추석명절에 학부형들을 초청해 강습소의 필요성을 알렸다. 부녀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주민들이 서로 믿음을 가지고 마을 공동의 사업을 도모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최용신의 헌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처음 샘골에 도착했을 때 고개를 갸웃하던 주민들이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신간회 수원지회 감사를 지낸 염석주의 도움이 컸다. 1932년 5월에는 기다리던 강습소의 인가가 나왔고 이듬 해 1월에는 1천3백 평의 대지에 새 교사를 마련하였다. 학교를 확장하여 배나 많은 120명을 모집했지만 입학을 원하는 아동을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용신은 이들을 모아 따로 가르쳤다.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감나무를 비롯한 유실수 묘목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여기서 거둔 수입의 일부를 강습소 유지와 농기구를 구입하는 경비로 사용하였다. 미혼의 20대 처녀는 어느 듯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마을에 울려 퍼졌던 샘골 강습소 교가는 그의 야무진 꿈이 담겨 있다.

반월성 황무지 골짜기로/ 따뜻한 햇볕은 찾아오네/ 우리에 강습소는 조선의 빛/ 우리에 강습소는 조선의 빛

오늘은 이 땅에 씨 뿌리고/ 내일은 이 땅에 향내 뻗쳐/ 우리에 강습소는 조선의 싹/ 우리에 강습소는 조선의 싹

최용신기념관에 있는 유훈비.
최용신기념관에 있는 유훈비.

샘골학원의 비약적인 성장을 부담스럽게 여긴 일제는 경찰을 통해 학생 수를 반으로 줄이라는 압력을 넣었다. 학원의 운영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던 YWCA에도 압력을 넣어 후원금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출구를 모색하던 최용신은 유학을 계획했다. 일본에 유학중이던 약혼자 김학준과 만나 장래를 의논하고, 완전한 교육을 위해 공부를 더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학원 운영을 후임 교사에게 맡기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진학하여 공부를 시작했으나 유학 생활 석 달 만에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리가 부어올라 걷기도 힘들었다. 결국 그는 9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고향에서 요양할 계획이었으나 다시 샘골로 돌아왔다. 단지 누워 있기만 해도 좋으니 꼭 샘골로 돌아와 달라는 주민들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병을 치유하며 교육에 정성을 쏟고 있을 때 샘골학원에 위기가 찾아왔다. 1934년 10월, YWCA가 더 이상 운영비를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통보하였던 것이다. 최용신은 동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글을 여성잡지에 기고했다.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하거든,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우리에게 무슨 발전이 있으며 늘어감이 있겠습니까?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 주소서.”

1933년 샘골강습소 낙성식 기념사진 속 최용신.(앞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
1933년 샘골강습소 낙성식 기념사진 속 최용신.(앞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 땅을 적시다

최용신의 절절한 호소에도 세상은 별 반응이 없었다. 대안을 찾기 위해 궁리했으나 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운명일까, 이번에는 장이 꼬이는 희귀한 병이 들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해서 생긴 것이다. 그 샘골, 조선을 위해서 일하다 죽는다 한들 그게 무엇이 슬프랴!”

두 번에 걸쳐 수술을 하고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샘골 사람들의 병문안이 줄을 이었다. 추운 겨울에 어린 학생들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문병하며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1935년 12월 23일 자정 ‘샘골, 샘골’을 되뇌던 최용신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샘골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다 숨을 거둔 26세 젊은 여선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렀다. 신문 기사를 보고 심훈이 샘골을 방문하여 최용신의 행적을 취재한 후 지은 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에 장기간 연재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원고농에 재학할 때 최용신을 후원했던 류달영이 스승 김교신의 도움을 받아 <최용신 소전>를 펴내면서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은 실존 인물 최용신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샘골학원을 계속 운영해 달라는 최용신의 유언은 지켜졌다. 일제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으나 지역민들이 마음을 모으고 사정을 알게 된 청년 학생들이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언니의 뜻을 잇기 위해 동생 최용경도 보조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최용신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여성단체협의회가 “용신봉사상”을, 안산시가 “최용신봉사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지역민의 노력으로 1995년에 국가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2005년 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안산 상록구 소재 최용신기념관.
안산 상록구 소재 최용신기념관.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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