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 학교 유적지를 찾아서] 10. 광주초등학교

韓 학생 구타한 日 목수 가벼운 조치에… 동맹휴학으로 맞선 거룩한 항일정신

광주시 3·1만세운동 재현
광주시 3·1만세운동 재현

3·1운동이 발발 한지 100주년이 되다 보니 현장을 증언하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현장에 건립된 기념비가 그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세시위 현장에 아무런 표지조차 없는 곳이 아직도 많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역사가 지닌 힘을 믿기 때문이리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광주 공립보통학교(현 광주초등학교)는 1917년 광주군 행정구역 개편 및 중부면 산성리에 있던 군청의 경안면 경안리 이전, 그리고 이에 따른 1군 1교 정책에 따라 1918년 4월 경안리(옛 주막리)에 설립·개교했다.

광주 공립보통학교에서 전개된 동맹휴학은 민족적 차별에 항거하면서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1921년 8월 한국인 4학년생 황추호(黃秋浩)가 학교 공부를 마치고 교실 출입구를 나설 때, 마침 그의 연필이 교실 마루 밑으로 떨어지게 돼 이를 찾으려고 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여자부 교실을 신축하고 있던 일본인 목수 오케구치가 일본말로 욕을 하며 기왓장과 망치로 사정없이 구타, 황추호를 실신시킴으로써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4학년 학생들이 사건 현장의 주위에 모여들자, 일본인 목수는 다시 삽을 들고 마구 휘둘러 무고한 학생들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한바탕 큰 소동으로 발전됐다.

3·1절 기념식.
3·1절 기념식.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일본인 목수에게 훈계만 하고 석방시켰다. 이 사건에 대해 학교 당국이 무성의하게 대처하자 학생들은 크게 반발해 동맹휴학이라는 강경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8월 29일 학생들은 무더기 휴학원을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그러나 당시 학교장은 오히려 황추호가 잘못해서 발생한 것이라 하였고, 이에 대해 8월 30일·31일 양일간 학부모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고 선후책을 강구, 결국 일본인 목수를 고소하여 재수감하게 됐다.

이에 조선일보에서는 당시 관련 기사를 다음과 같이 냈다.

“황추호가 애매하게 통구여시라는 목수에게 구타를 당하여 위태한 경우에 있음은, 현상을 눈으로 본 자와 사실을 귀로 들은 자가 모두 분한 생각이 있는 모양인데, 하물며 학생들이야 더 말할 것이 무엇 있으며, 또 학생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일개 목수를 위하여 학생이 볼온한 행동을 한다고 위협함은 통탄하기 한량없는지라, 어찌 침묵하고 있으리요. 이 사건이 원만히 해결되기 전까지는 엄연히 등교할 이치가 없다.”

당시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민족적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00년 전 여기에 맞선 한국인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강력한 항일민족정신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광주 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관련 기사(1921년 8월 31일자 석간 3면).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광주 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관련 기사(1921년 8월 31일자 석간 3면).

수원 대평초 이경옥 교사

사진=광주시·광주초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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