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 학교 유적지를 찾아서] 7. 파주 교하초등학교

“만삭의 몸이라 할지라도 독립 의지 내려 놓을 수 없다”
독립만세운동 선봉에 선 ‘파주의 유관순’ 임명애 지사

지난 3월 11일 준공된 ‘파주 교하 3ㆍ1독립운동 기념비’는 높이 4.72m, 폭 3m 규모로 기단부 원형 3조각은 3•1운동의 ‘3’, 세로기둥은 ‘1’을 상징하고 원형둘레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그날의 기억을 담고 있다. 파주시 제공
지난 3월 11일 준공된 ‘파주 교하 3ㆍ1독립운동 기념비’는 높이 4.72m, 폭 3m 규모로 기단부 원형 3조각은 3•1운동의 ‘3’, 세로기둥은 ‘1’을 상징하고 원형둘레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그날의 기억을 담고 있다. 파주시 제공

파주시는 얼마 전 3·1절 100주년을 맞아 파주시 일대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의 도화선이 됐던 교하초등학교(옛 교하공립보통학교)에 ‘파주 교하 3·1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준공식을 가졌다. 경기도 지역 언론뿐 아니라 중앙 일간지에서도 기사로 보도했고, 파주시에서도 3·10 교하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독립만세 거리행진 퍼포먼스를 하였다. 또한 파주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00주년 기념식 및 경축음악회, 파주 독립운동가 윤기섭 선생 학술심포지엄, 3ㆍ1운동 거리대행진 재현행사 등 4대 분야(기념비 건립, 기념·문화사업, 교육·학술전시, 시민참여·홍보 등)의 총 17개 사업이다. 100년의 역사와 가치를 범시민적으로 기억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들이 포함됐으며 이번 추진단 회의결과를 토대로 확정된 기념사업을 본격 추진할 예정이다.

파주서 맨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난 교하초등학교 전경.
파주서 맨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난 교하초등학교 전경.

파주에서 맨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어디일까?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에 의하면 1919년 3월 10일 구세군 교인 임명애(林明愛)는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 100여 명을 독려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기록돼 있다. 다른 곳과 달리 파주에선 보통학교가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에 교하초등학교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임명애가 선창하자 학생들도 따라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파주 곳곳으로 번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이 시위 이후 3월25일 당시 16살 학생인 김수덕과 24살 농민·김선명이 염규호, 임명애의 집에 와서 독립운동을 의논하고 염규호가 원고를 작성하고, 김수덕이 등사판으로 격문을 만들어 와석면 당하리 일대에 배포했다. 격문의 내용은 “동리 산으로 오는 28일 일동은 모이라. 집합치 않는 자의 집에는 방화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당시에는 이처럼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가며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의지를 담았던 것이다.

하루 전인 3월 27일에 만세시위가 실행됐다. 700여 명이 시작했는데, 면사무소로 행진하면서 1천500여 명에 달했다. 교하헌병주재소 헌병들이 발포하면서 최홍주가 사망했고, 그로 인해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파주 독립만세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임명애와 염규호였다. 임명애는 독립운동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3월 25일 시위가 임명애 집에서 기획됐고, 체포된 이후 경성지방법원에서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그 내용을 보면 “임명애는 공립보통학교운동장에서 생도들을 선동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 격문을 배부해 자기 면민들과 조선독립운동을 하려고 꾀하여 이 날 소관 관청의 허가를 얻지 않고서 볼온문서를 인쇄하여 반포함으로써 그 지방의 정일을 깬 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염규호, 김수덕, 김선명에게는 징역 1년형을 임명애에게는 징역 1년6월형을 판결했다. 당시 만삭이었던 임명해는 구세군 사령 부인으로도 활약했다.

임명애 지사 수형카드
임명애 지사 수형카드

임명애는 서대문형무소에 유관순과 함께 8호 감방에 수감됐다. 그녀는 구세군 사령 부인으로 임신 중에 체포됐다. 임명애는 출산이 임박하여 수감된 지 한 달만인 1919년 10월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출산하고 11월에 신생아와 함께 다시 들어와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한겨울 엄동설한 추위에 난방도 되지 않는 감옥은 기저귀가 얼어붙는 등 아이를 키우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때 같이 수감돼 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산모에게 자기 밥을 덜어주고, 아기의 오줌 싼 기저귀를 손으로 짜서 허리에 감싸 체온으로 말려주는 등 함께 아기를 돌봤다. 1921년 4월 만기 출소하면서 임명애는 고향에 돌아왔다. 현재 파주시에서는 임명애 생애를 담은 창작 뮤지컬을 제작해 공연할 예정이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독립운동으로 평가되는 항일투쟁이었다. 31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민족의 역사를 지탱하며 독립투쟁을 주도해 왔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역사적 법통으로 천명하고 있는 만큼 100주년의 의미는 더욱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윤용한 화성 고정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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