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같은 교사 밑에서 수업받을 수 없다”
민족말살·식민지 교육에 반기든 거룩한 항일정신
우리의 역사를 되새길 때 격변기 속 시대의 변곡점에는 항상 학생들의 외침이 울림이 되어 사회에 큰 파장을 끼쳤다.
특히 일제의 횡포가 무자비하게 쏟아졌던 1900년대 학생들의 독립투쟁은 우리 역사 속에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시대의 정신이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전에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의 2ㆍ8 독립선언서 낭독은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각 지역의 학교를 중심으로 3ㆍ1운동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이후 사그라들었던 불씨는 순종의 인산일을 기점으로 다시 한번 학생들이 중심이 된 6ㆍ10 만세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어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당시의 학생들은 ‘학생’의 본분이 무엇인지, ‘학생’으로서의 사명감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키게 한다.
이런 시위와 더불어 학생운동 중 가장 급진적인 집단행동의 한 형태는 동맹휴학이라 할 수 있다. 학생 상호 간의 연대를 통한 투쟁으로 학교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까지 항의를 확산시킬 수 있으므로 효과가 매우 컸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1920년대에 시작해 순종의 인산일, 즉 6ㆍ10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26년 이후 절정에 이른다. 학생들은 정학과 퇴학과 같은 징계를 무릅쓰고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일본이 교사들의 언행과 민족말살교육정책 및 식민지 교육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다.
‘교육도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오산시’도 오래 전부터 교육열이 높아 일찍 학교가 설립됐으며, 그 중 1913년 4월 1일 개교한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실시한 곳 중의 하나이다.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6학년생 71명은 1926년 5월 3일 담임교사 후루카와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다나카 교장에게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후루카와 교사가 항상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하고 사소한 과실에도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며 수업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했기 때문이다. 또한 농업실습시간을 과중하게 해 학생들을 괴롭혀 온 데다가 순종의 망곡제를 저지하자 학생들은 이와 같은 교사 밑에서 수업을 받을 수 없으니 처벌해 달라고 동맹휴학을 단행한 것이다.
이에 오산공립보통학교 후원회 회장 한필호가 중재를 시도했으나, 다나카 교장이 후루카와 교사의 비행을 시인하면서도 그를 처벌할 수는 없다 함으로써, 또다시 학생들이 집단 휴학을 하는 등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 더이상 후루카와 교사의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해 5월 7일 학생들은 수업에 복귀했다. 이후 1926년 5월 24일에는 오산공립농업보습학교에서도 일제의 식민지 실업교육에 항거해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오산을 비롯한 경기도의 동맹휴학은 안성, 광주, 이천, 수원, 부천, 포천 등 특정 지역을 가릴 것 없이 각지에서 골고루 단행됐다. 근대적 대중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선구자적 사명감을 갖고 집단행동을 했고, 이는 당시 각계각층의 대중을 각성시키는 파급력을 자아냈다. 하지만 당시 학생들의 영향력에 비해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나 추모하는 자리는 미약한 실정이다.
성호초등학교에 위치한 100주년 비석이나 홈페이지에도 이러한 역사를 알리는 내용이 전무한 상황이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제는 우리가 당시의 ‘학생’들을 항일독립운동의 주역으로서 불러내야 할 사명감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나경훈 평택 진위초 교사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