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100년 전 성남 만세운동 중심지 벅찬 감동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는 거룩한 희생과 나라 사랑의 정신이 동시에 용솟음친 역사적 사건이었다. 3ㆍ1운동은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 주권 시대를 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기틀이 됐다. 경기도교육청이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거점으로 활용됐던 도내 학교 10곳을 발굴했다. 이에 본보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역사학습의 장이 되고 있으며 독립운동의 숨결이 남아있는 도내 항일독립운동 학교 유적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함으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는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다”로 끝난다. 순국선열들의 빛을 더욱 밝힐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후손의 흔적이 경기도 성남 지역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3ㆍ1운동 100돌. 우리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은 3ㆍ1운동이 성남에서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성남의 3ㆍ1운동은 대왕, 낙생, 돌마와 중부 지역의 남한산성 등지에서 일어났다. 1919년 3월 26일 인근 송파 일대의 만세 시위는 3월 27일, 28일 양일간에 성남으로 파급됐다. 성남에서는 27일, 28일, 29일 3일간 가장 집중적으로 폭발했다. 성남지역에서는 주민 3천300여 명이 3ㆍ1운동에 참여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 낙생고등학교 정문 앞 빈터는 국내항일운동 사적지다. 학교 정문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3.1운동 만세 시위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곳에서는 1919년 3월 27일 새벽부터 29일까지 사흘간 광주군 낙생면과 돌마면 면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돌마면 군중들은 거사 당일인 27일 오전 10시경, 분당리 장터에 모여서 한백봉, 한순회 등의 주도하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게 외치며 본격적인 시위에 돌입했다. 면내의 여러 곳을 순회하다가 오후에는 낙생면 판교리에 진출, 낙생면 면민들과 합세했다. 인근 백현리·운중리·궁내리· 주민들까지 시위에 합세하게 되면서 그 수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판교리는 면소재지이자, 7명의 헌병이 소속된 헌병주재소가 설치돼 있던 곳이었다. 시위 군중들의 숫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과격한 양상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탓인지 헌병들과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일 저녁 무렵까지 시위대는 만세운동을 계속하다가 해산했다.
100년의 시간이 흘러 낙생고등학교 학생들이 3ㆍ1절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행사를 펼쳐 감동을 주었다. 학생들은 2월 한달 간 지역 만세운동 스터디 내용을 우드락에 제작해서 3월 1일 수내역에서 독립운동 전시회를 개최했고 낙생고 오케스트라 동아리 ‘노바’는 수내역에서 태극기 머리띠를 하고 ‘고향의 봄’, ‘홀로아리랑’, ‘사랑의 인사’를 연주한 후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시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눈길을 끌었다.
학생들은 “우리가 서 있는 이곳, 공부하는 이 곳에서 저마다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던 성남 3ㆍ1운동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알게 돼 가슴이 벅차다”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산화하신 애국선열들의 올곧은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길이 기억될 역사교육의 장이라는 점을 잊지 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강현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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