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로고
[개성인삼의 명성을 찾아서] 상. 유래와 명성
지역사회 개성인삼의 명성을 찾아서

[개성인삼의 명성을 찾아서] 상. 유래와 명성

고려~조선시대 대표 작물… 중국서 ‘최고의 명약’ 칭송
고려 중기 이후 최적의 환경 개성지역 중심으로 재배돼 유래
1724년 ‘일복식 재배법’ 개발로 인공재배 일반화 시대 열어
6·25전쟁때 결사대 조직 명맥 이어… 연천·포천 최대 생산지로

▲ 1910년에 설립한 개성삼업조합 사무소
▲ 1910년에 설립한 개성삼업조합 사무소. 개성인삼농협 제공

고려와 조선왕조 때 중국 송나라와 청나라 시장을 공략해 중국에서 최고의 명약으로 불릴 정도로 그 약효와 명성이 대단했던 고려인삼의 후신인 개성인삼. 개성인삼은 일제 강점기와 6ㆍ25를 겪으면서 경기 북부권을 중심으로 그 맥을 이어오며 한 때 전국을 호령했지만, KT&G의 출범과 각 지자체의 발 빠른 움직임으로 개성인삼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포천과 연천을 중심으로 한 개성인삼농협은 신임 조합장을 중심으로 개성인삼의 명성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개성인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고려인삼의 후신인 개성인삼의 발자취와 개성인삼의 효능과 약효, 추후 비전과 발전방향 등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상>개성인삼의 효능과 약효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모두 ‘고려인삼’으로 통칭하기 시작했다. 고려 중기 이후부터 고려인삼은 중국 명나라 시장에 진출, 최고의 명약으로 불리며 개성지방이 중심이 되면서 ‘개성인삼’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됐다.

 

이후 조선 현종 2년(1660년)에 개성에서 양직묘삼농법이 개발돼 인삼을 농작물화하고 널리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조실록’에는 영조 원년인 1724년 개성에서 일복식 인삼재배법이 집중적으로 연구돼 인삼의 인공재배가 일반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산삼이 많이 채굴됐던 개성지방이 인공재배 조건으로도 적합한 최적의 자연 환경적 여건을 갖추었는데 그곳이 고려의 옛 도읍이었던 개성(송도)으로 나타났다.

 

개성인삼조합의 전신인 개성삼업조합은 1910년 삼도 개성에서 송삼계원의 모임인 삼도중을 인수해 조직됐다. 이후로 개성은 오랫동안 인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해 오면서 인삼재배를 선도해 왔다. 6ㆍ25전쟁으로 천 년을 이어 온 인삼재배 기술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자 삼농인들은 유업을 계승하고자 젊은이들로 결사대를 조직, 해병대의 지원 아래 땅속에 묻어 두었던 삼종자를 꺼내 와서 다시 인삼 재배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어렵사리 남한으로 옮겨져 뿌리를 내린 개성인삼은 1957년 개성 출신 삼농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서울에서 개성삼업조합을 재창립하게 됐다. 포천, 연천, 파주, 강화 등을 중심으로 식재면적을 확장해 나가며 고려인삼의 유구한 역사를 다시 이어 나가고자 한 것이다.

 

개성삼업조합은 경작면적 확산에 따라 1973년 9월 서울에 있던 사무실을 주산지인 포천으로 이전했다. 또 1978년 3월 인삼산업법에 따라 개성인삼경작조합으로 개칭됐다가 1989년 1월 개성인삼협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어 지난 2000년 7월 농협법 개정으로 농협과 통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인삼재배의 최적지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북위 38도선 근방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개성이 이북지역이라 포천, 연천 지방의 위치와 기후 및 토질이 개성지방과 거의 같아 개성인삼의 최대 생산지로 손꼽히고 있다. 이에 현재 개성인삼농협은 6년근 홍삼포 단지로 559ha의 면적을 관리하고 있다.

 

개성인삼농협 관계자는 “양직묘삼 식재로 전국에서 생산되는 인삼 중 체형이 가장 우수하고 내용조직이 충실하며 고유의 향이 짙고 사포닌 함량이 많아 홍삼수율이 가장 높은 6년근 인삼이 바로 포천과 연천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포천=김두현기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