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깝게 金은 놓쳤지만… 그 모든 순간이 축복이었다”
1984년 LA 올림픽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유도 헤비급(+95㎏급)에서 거푸 동메달을 획득한 조용철(58ㆍ용인대 유도경기지도학과 교수) 대한유도회 상임부회장은 비록 금메달은 아니었지만, 그 보다도 더욱 값진 한국 유도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이뤄냈다.
첫 올림픽 출전인 LA 대회에서 헤비급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획득한데 이어, 4년 뒤 안방에서 열린 서울 대회에서 2회 연속 메달을 획득해 110년 한국 유도 역사상 유일한 헤비급 연속 메달리스트로 남아있다.
당시 조용철 선수의 서울 올림픽 동메달은 한 편의 인간승리 드라마였다. 198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의 심각한 손상으로 선수생활을 계속하기 어렵게 되자 은퇴를 결심했었다.
좌절감 속에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김정행 대한유도회 부회장으로부터 서울올림픽 출전을 권유받고, 부상의 고통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이겨낸 끝에 자신의 두 번째 올림픽 무대에 서게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 조 부회장은 “정상적으로는 운동을 계속하고 경기를 치를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이 하고자 하니 안되는게 없더라”라며 “의지가 있으면 못이룰 것이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끝난 줄 알았던 올림픽 무대에 다시 서게 된 그에게는 개인적인 영광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직책이 주어졌다. 아픈 몸을 이끌고 경기에 나서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올림픽에 대한민국 선수단을 대표해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는 ‘기수(旗手)’로 선정된 것이다.
조 부회장은 “통상적으로 기수는 메달이 유력한 선수가 맡기 때문에 솔직히 부담감이 컸었다. 또한 운동을 해야 하는 데 자주 불려나가 입장 리허설을 하는 바람에 귀찮기도 했었다”고 털어놨다.
서울 올림픽 폐막을 하루 앞둔 1988년 10월 1일 장충체육관. 조용철은 유도경기 마지막날 +95㎏급 경기에 나섰다. 부담감 속에서도 타고난 힘과 부단히 연마한 기술을 바탕으로 가뿐히 4강에 오른 그가 맞닥뜨린 상대는 국제대회에서 번번히 맞선 ‘숙적’ 사이토 히토시(일본)였다.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사이토를 상대로 조용철은 1985년 서울 세계유도선수권 대회 결승서 맞붙어 왼팔 꺾기로 기권승을 거두고 우승했으나, 이듬해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결승서 패해 은메달에 머물렀다.
사이토와 질긴 인연을 이어가던 조용철에게는 4강전에 또다른 적이있었다. 대한민국 장충체육관에서 경기를 하는데 8천 관중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조 부회장은 “내가 경기하기 이전까지 일본이 유도에서 금메달이 나오지 않자 일본인들의 관심이 사이토에게 쏠리면서 대규모로 입장했다”면서 “사이토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는데도 경기 종료 15초를 남기고 애매한 상황에서 지도를 받았다. 억울함에 항의하다가 또다시 지도를 받는 바람에 패해 결승에 오르지 못하고 패자부활전서 동메달을 따냈다”고 밝혔다.
첫 금메달의 기회를 아쉽게 날리고 현역에서 은퇴, 이듬해부터 모교에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후진을 양성한 그는 이후 모교와 국가대표팀에서 수 많은 세계선수권 및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을 배출해내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경기일보 DB
서울 올림픽의 영광을 뒤로 30년간 대학 교수이자 유도 행정가로 한국 유도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조용철 부회장은 “30년 세월이 지나면서 한국 유도가 많은 발전을 가져왔고, 세계 유도의 흐름 역시 여러 차례 변화의 물결이 몰아쳤다”면서 “과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유도가 부상 우려로 인해 최근 다이내믹한 여러 기술들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도가 스포츠 팬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흥미를 끌지 못했던 태권도가 품새 종목을 도입해 변화를 이끌 듯이 화려한 기술의 부활과 본(本) 경연도 활성화 돼야 한다”고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더불어 조 부회장은 “유도는 예(禮)로 시작해서 예(禮)로 끝나는 종목이다. 요즘 세태의 변화로 이 같은 유도의 무도정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유도정신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성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인성이 바르지 못한 유도선수에게 기술적인 가르침은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한국 유도가 다시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체력 단련이 우선 돼야 기술의 일본유도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서구유도를 이길 수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유도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ㆍ보급이 시급하다. 대한유도회에서도 이를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30년 지도자와 학자, 체육 행정가로서의 연륜이 물씬 묻어나는 조용철 부회장의 뇌리 속에는 여전히 88 서울올림픽에서의 도전과 환희, 그리고 아쉬움의 순간이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황선학기자
사진=조태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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