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두 개의 인천 상륙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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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8월 12일. 일본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제물포에 상륙했다. 군함 4척과 1개 대대 병력의 호위를 받았다. 임오군란(6월 9일)으로 입은 일본측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고민 끝에 이유원과 김홍집을 회담 대표로 내세웠다. 회담은 이미 군사력에 의해 강압되어 있었다. 8월 28일 오후 시작된 회담 분위기가 그랬다. 제물포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 히에이(比叡) 함상이 회담 장소였다. 일본군이 회담장을 삼엄하게 에워쌌다. ▶30일 조약-제물포 조약-이 체결됐다. 분위기만큼이나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일본에 10만원씩 5년간 50만 원을 지급할 것ㆍ일본에 조선 사죄단을 파견할 것ㆍ제물포 등 개방된 항구의 범위를 확장할 것ㆍ일본 관리의 조선 내 여행을 융숭히 대접할 것…. 임오군란 피해 보상을 넘어 경제 침탈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박영효, 김옥균, 김만식이 수신사-사죄단-로 일본에 갔고, 일본 공사관 수비를 구실로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이 한성에 주둔하게 됐다. 조선 국권을 침탈한 일본의 한반도 상륙이 곧 제물포 상륙이었다. ▶68년 뒤인 1950년 9월 15일. 인천에서 또 다른 상륙이 시작됐다. 오전 6시, 한·미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해 2시간 만에 작전을 끝냈다. 이어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이 상륙했다. 파죽지세로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까지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이 진격해 한강을 건넜다. 27일 정오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됐다. 낙동강까지 남진하던 북한 인민군의 패퇴가 시작됐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인천 상륙이다. 일본군의 상륙이고, 미국군의 상륙이다. 하나부사가 전권 대사고, 맥아더가 총사령관이다. 국권을 침탈한 상륙이고, 국권을 수호한 상륙이다. 역사 교과서는 1882년 것을 치욕의 역사로, 1950년 것을 극복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런 평가의 주체는 과거 조선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당시 국가의 한쪽-통상 대한민국이라고 통칭되는-에서만 내려지는 정의(定義)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인천 자유공원 내 맥아더 장군 동상에 많은 인사들이 몰렸다. 동상을 철거하겠다는 일부 단체 회원들이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6ㆍ25 참전유공자회’ 등 보수단체들이 그 자리를 지켰다. 이번엔 동상 수호가 목적이다. 지금의 맥아더 동상 처지가 이렇다. 한국 이념 논쟁의 상징이다. 그만큼 6ㆍ25 전쟁에서의 맥아더 역할은 컸다. 대한민국의 존재와 부존재를 그가 결정했다. 그래서일까. 인천 상륙 작전을 보는 인식 속에서 종북(從北) 판단의 기준점이 어른거린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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