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중국 요녕성 유하현 경기촌 정착 안봉려 할머니

꿈에본 고향… 타국살이 恨

▲ 일제강점기 일본은 만주 지역 내 세력 확장을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만주로 이주 시켰다. 그 숫자만 25만 명에 추산된다. 경기도민 역시 마찬가지. 중국 요녕성 유하현에는 ‘경기촌’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다. 안봉려 할머니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우리나라에 이어 중국 만주지역까지 침탈한 일본은 만주 지역에서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자 일본인과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편다.

1936~1940년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약 25만명으로 추산된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경기도인들은 집과 농지를 제공하겠다는 일본의 약속을 믿고 압록강을 넘어왔다.

하지만 막상 이주 이후 그 약속은 온데간데 없이 외지에서 실향민으로 수십년째 그 명맥을 유지했다. 당시 이주했던 ‘경기도민’들은 독립 이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기도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한민족임을, 조선족임을 자부심으로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중국 요녕성 유하현 경기촌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안봉려 할머니(83)를 만나 이주 당시의 상황과 그들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안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75여년 전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서 살다 만주로 이주를 하게 됐다.

당시 일본은 만주지역을 정벌한 뒤 만주국을 건국하고 이 지역을 통치하고자 조선인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이주를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부역을 부과했다. 졸지에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조선인들은 고향을 등진 채 낯선 만주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8세이던 안 할머니는 식솔 10명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로 이동한 시기는 3월이었다.

3월의 만주는 고향이던 경기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추운 날씨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안 할머니의 여동생이 추운 날씨 속에 죽은 줄 알았다가 따뜻한 여관방에 들여놓으니 다시 살아났다고 할 정도로 이들의 강제이주길은 나라를 잃은 난민들의 고난과 슬픔의 시간이었다.

“여기 오자마자 아버지는 금방 돌아가셨어요. 염병이라는 병이 돌아갖고….”

만주로 강제 이주한 경기도민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풍토병이 돌고 물이 맞지 않으면서 이주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염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다행히 살아남은 경기인들의 삶도 순탄치 못했다. 집도 없는 곳에서 삶을 꾸려나가야 했으며 조선인임에도 현지 중국인들로부터는 ‘우리나라를 침략하러 들어온 일본놈’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많은 대동강아…변함없이 잘 있느냐.”

75여년 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서 살다 만주로 이주한 안봉려 할머니는 같이 이주한 사람들과 모일 때면 이 노래를 종종 불렀다고 한다. 나라 잃은 슬픔을 대중가요로 승화했던 ‘한많은 대동강’, ‘눈물 젖은 두만강’이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경기도민 사이에 자주 불려졌다.

이 곳에서 삶을 영위했던 경기촌 사람들의 후손들은 이제는 대부분 한국으로 들어가거나 중국 내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한 상태다. 한참 사람이 많을 때는 300명이 넘는 경기인들과 후손들이 이곳을 지켰지만 지금은 8가구에 불과하다.

안 할머니의 호적은 광주시로 돼있다. 국내법상 중국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다. 국내에 들어와서 사시는 것은 어떻겠냐는 질문에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면서 눈물섞인 말을 이었다.

“내 남편도 그렇고 내 자식들 넷이나 이곳에 묻어 놓고 나혼자 어디를 가요.”

글 = 정진욱기자 사진 = 오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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