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종이통장의 퇴출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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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14cm, 세로 8.7cm 크기에 그 안의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뿌듯해지는 마법의 종이, 바로 통장이다. 통장은 돈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어 금고 역할을 해주는가 하면, 서민들에겐 꿈을 실현시켜 주는 도구였다.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돈으로 꿈을 성취할 수 있었기에 종이 이상의 큰 의미를 가졌다. 어떤 이의 통장엔 배고픔과 눈물로 버텨낸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기도 했다.

종이통장은 1897년 고종 34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은행인 한성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이 설립되면서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20여년 만에 종이통장이 사라지게 됐다.

인터넷과 모바일 뱅킹 이용이 늘면서 종이통장을 만들지 않기로 한 것이다. 금융당국은 9월부터 2년간 종이통장을 만들지 않는 고객에겐 금리우대 등의 혜택을 주고, 2017년 9월부터는 아예 종이통장을 발행하지 않을 방침이다. 2020년 9월부터는 통장 발급을 원하면 발급 비용을 고객이 부담하게 된다.

통장 개수가 ‘부’의 잣대가 된 건 옛말이다. 고객과 은행 모두에 불필요한 부담과 비용만 초래하는 존재가 됐다. 고객 입장에선 통장의 입출금 거래내역이 가득 차 이월하려면 직접 은행창구를 방문해야 한다. 분실ㆍ훼손하거나 인감을 변경할 경우엔 2천원의 수수료를 내고 재발급 받아야 한다. 지난해 고객이 통장 재발행 비용으로 은행에 낸 수수료만 60억원이다.

종이통장을 찍어내는 은행들의 제작 비용과 인건비ㆍ관리비 부담도 만만치 않다. 금융감독원은 종이통장 1개의 제작 단가는 300원에 불과하지만 인건비ㆍ관리비 등을 더하면 5천원에서 1만8천원의 비용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신한은행은 2013년 1천100만개, 2014년 1천90만개의 종이통장을 만들었는데 간접비용까지 반영하면 연간 150억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추산했다.

종이통장은 미국ㆍ영국 등에서는 금융거래가 전산화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미국은 1990년대, 영국은 2000년대에 종이통장을 없앴다. 중국도 2010년대 들어서는 소비자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통장을 발급해주는데, 비율이 20% 정도다.

종이통장의 퇴출은 시대적인 흐름이다. 하지만 아직도 장년층일수록 종이통장 거래를 선호하는 편이다. 오랜 거래 습관이 남아있기도 하고, 인터넷ㆍ모바일뱅킹에 서투르거나 안전성을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이들을 위한 배려도 충분히 해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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